김덕진 / 광주교대 교수

조선 시대에 전라도에서 해상 교역이 가장 발달한 곳은 강진이었다(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해상 교역의 센터 역할은 포구가 수행하였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고지도를 보면, 강진에는 15곳에 포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 남당포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남당포는 강진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옛 기록에 따르면, 강진성 남문 5리 지점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남당포는 남해안의 대표적 포구로서 강진의 관문이자 제주 출발지 역할을 하였다.

그런 남당포가 간척지 공사로 옛 영화를 뒤로 하였다. 새로 조성된 들녘 사이로 남포 마을이 그 옛날을 아련히 전해주고 있다. 얕아진 수로에는 큰 배는 간 데 없고 작은 고깃배만이 오갈 뿐이다(주희춘, 제주 고대항로를 추적한다).

우선, 남당포는 강진읍의 관문으로서 읍내로 들어오는 화물은 대부분 이곳을 통과하였다. 형구용 목재를 봄과 가을에 완도 가리포진에서 납부하는데, 가리포진에서 남당포까지의 해운은 각포 소재 선박이 담당하였고 남당포에서 읍내까지의 육운은 두 마을에서 담당하였다(강진읍지).

이어, 남당포는 서남해 해산물이 집결하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해상교역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강진의 삭선 진상물 가운데 남당포에서 김과 말린 미역을 값을 받고 담당하였고, 이 외에 동지사 요청 전복도 남당포에서 납품하였다.

남당포 인근에서 잠수하여 잡고, 작살로 잡은 것뿐만 아니라, 인근 도서에서 가져온 것까지 모두 남당포를 경유하여 강진 읍내, 병영, 그리고 인근 고을과 감영으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남당포는 화물과 사람의 다도해⋅제주 출발지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사람이 감귤을 배에 싣고 남당포에 와서 내려놓고 포목을 싣고 돌아가다가 표류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남당포 상인이 포목과 백미 및 담배 등을 사서 제주로 장사하러 가다가 표류한 사건이 있었다.

제주 3읍 수령과 출장 관리뿐만 아니라 유배인들도 남당포를 거쳐 갔다. 우암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갈 때에 남당포에서 출항하기 전에 바람을 기다리느라 백련사에서 수일 머물렀던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마지막으로, 남당포에는 병영창(兵營倉)이 병영 창설 당시부터 병영의 주요 군량미를 보관하는 곳으로 설치되었다가, 나중에는 병영의 주요 수입원인 환곡을 운영하는 창고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3천석 이상의 환곡을 보유한 병영 외창(外倉)이 바로 남당포에 개설되어 있었다(정조실록). 환곡을 받으러 온 주민 및 감독하러 온 관리들로 북적거렸다.

이처럼 남당포는 조선 시대에 남해안의 대표적 포구로 매우 번화한 마을이었다. 정약용은 4백여 호가 된다고 했으니(목민심서), 어지간한 면(面)의 규모이다. 그 광경을 충청도 진천 출신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남당가(南塘歌)」라는 7영시를 지어 남당포의 정취와 풍경, 바다와 연관된 주민들의 일상 삶을 매우 소상히 읊었다(두타초). 그는 강진 병영성에서 유배 생활하고 있는 장인 송상기를 면회하고자 1722년(경종 2)에 내려와 남당포에 들러 하룻밤을 자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그가 읊은 남당포의 풍경은 80년 후 이곳에 유배온 정약용에게도 그대로 목격되었다(탐진어가).

노을진 남포 마을에 바다의 정취와 함께 들녘의 풍경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분명 근대화(산업화)가 가져다 준 선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왠지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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