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거북 신드롬... 잡히면 상부에 보고

전국에 거북 신드롬... 잡히면 상부에 보고
1957년 여수서는 거북잡아서 놓쳐버려 망신살
강원도에서는 막걸리 한말 먹여 살려 보내기도

1968년 6월 여천앞바다에서 잡혀 창경원으로 올라온 거북(좌측)과 1962년 추자도 앞바다에서 잡혀 역시 창경원으로 왔다가 다시 바다로 되돌려 보내졌던 거북의 모습이다. 왼쪽사진은 거북을 억지로 세워놓고 있고, 오른쪽은 밧줄로 거북을 칭칭 동여매놓고 있다. 모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니다.
1949년 강진에서 잡힌 거북이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속에 전국적인 히트를 치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북신드롬이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당시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몇가지 사례를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중에 단연 압권은 1957년 8월초 여수근해에서 잡힌 세계최대 거북사건이였다. 이승만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강진거북이 죽은지 1년이 된 시점이였다. 그해 8월 25일, 내무부치안국에 전남여수에서 길이가 삼십미나 되는 세계최대의 큰 거북이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강진거북이 죽은 후 이승만대통령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무부치안국이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이 보고는 전남경찰국의 오보로 금방 판명났다. 치안국이 다시 확인한 결과 실제 거북의 크기는 삼십미의 십분의 일 밖에 안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1949년 잡힌 강진거북이 도암지서 순경의 잘못된 보고로 ‘평상만한 크기’로 보고됐던 것과 비슷한 일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계 최대 거북’을 사육중이던 여수수산시험장이 거북을 곧바로 놓쳐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이였다.
 
당시 신문의 한 만평에는 ‘이 정도면 왈가왈부하기도 거북스런 일이다. 거북 한 마리가 동해궁에서 왕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에 나왔다가 인간에 붙들려 고초만 당하고 돌아간 것으로 생각해 둡시다’고 비꼬았다.<동아일보 1957년 8월 28일>

또 1971년 12월 17일에는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주민 5명이 마을앞 해상 1㎞ 지점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길이 2m, 너비 80㎝ 거북을 사로잡았다. 물론 거북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보’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실제로 거북의 길이가 2m였다면 이 거북이야 말로 세계최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무튼 마을사람들은 이 거북을 한약재로 팔기 위해 마을까지 끌고 갔으나 마을의 한 노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거북은 십장생중의 하나로 거북껍질은 비싼 한약재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노인은 ‘거북은 용왕과 가깝기 때문에’ 죽이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강원도에서도 거북에 술을 먹여 되돌려 보내면 액운을 면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노인의 뜻에 따라 마을주민들은 거북이 담긴 큰 통에 막걸리를 부어주었다. 그랬더니 거북은 막걸리를 단숨에 한말을 거뜬히 마시고 바다로 유유히 사라졌다. <경향신문 1971년 12월 21일자> 강진의 거북도 도암 죽방망이에 잡혀 있던 몇일 동안 몰려든 주민들이 건네준 막걸리를 상당히 마신일이 있었다.

1961년 8월 14일에는 제주도 추자도 부근에서 길이 1m 정도의 거북이 잡혀 서울 창경원으로 옮겨 키운적이 있었다. 제주도민들은 이 거북을 ‘바다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거북을 잡은 후 추자도 어민들의 어획고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민들의 하소연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침 창경원측도 겨울이 다가오면서 거북이 죽을 것을 우려해 바다로 돌려 보내기로 했다.

거북은 서울에서 경기도 오산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 온 다음 오산에서는 특별비행기편으로 제주도 모슬포까지 이동했다. <경향신문 1961년 10월 3일자> 거북이 바다로 돌아간 후 추자도 어민들의 고기잡이가 어떻게 됐다는 후문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거북이 오랜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상서로운 존재였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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