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곡괭이 끝에 청자수키와 하나가 ‘벌렁’...아! 청자기와

여인의 소쿠리에서 그렇게 찾던 청자기와 조각발견
이용희씨 집 마당은 ‘최고급 청자문화의 전시장’

1964년 9월22일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된 이용희씨 집 안마당의 모습니다.오른쪽으로 초가집 끝이 보이고 한복을 입은 여자가 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사진=미술자료 9호. 1964년 12월발행>
일제강점기 개성박물관은 국보급 청자의 보고였다. 당시 개성박물관은 100평남짓의 본관에 청자어룡형주전자(국보 61호), 청자참외모양병(국보 94호), 청자연꽃넝쿨무늬매병(국보 97호)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6.25가 일어나기 직전인 1949년 5월 18일 서울국립박물관으로 피난 내려와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급 청자 대부분이 개성박물관에서 피난 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개성박물관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소장하던 유물은 고풍스런 청자완형품이 아니였다. 개성박물관에는 작은 청자기와조각이 딱 한점 있었다.

개성박물관 초대관장이었던 고유섭(1905~1944) 관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청자기와 조각은 우리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아주 희귀한 물건이라 우리 박물관의 큰 자랑거리이지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당시 청자기와를 본 사람들은 깨진 기왓장 한 장이 어떻게 개성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이였다.

이용희씨 집 마당에서 발견된 청자기와 완형품과 조각들이 수북히 쌓여있다.<사진=경향신문 1975년 5월 10일자>
당시 깨진청자기와에 대한 개성박물관의 애정은 최근 발간된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이충렬 지음. 김영사 발간>’란 책에 잘 소개돼 있는데, 고유섭 관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청자기와를 하나하나 만드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고려시대에 청지기와로 정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33~34페이지 참조>

이렇듯 일제강점기에는 그 좋은 고려청자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됐는지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자기와뿐 아니라 모든 청자가 그랬다. 일제강점기때인 1925년 대구와 칠량일대 지표조사를 통해 100여기의 청자요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없었던 시절이다.

그후로 오랫동안 고유섭과 그의 제자 최순우는 청자가마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녔으나 결정적인 가마를 찾지 못했다. 최순우는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다.

1960년대초까지 고고학자들의 가슴을 쉴새없이 두근거리게 하는 몇줄의 기록이 고려사에 있었다. 고유섭 관장이 말한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에 관한 이야기다. 고려사 의종왕 11년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의종)이 왕업을 번영케 하고자 궁궐옆에 있던 민가 50채를 헐고 수덕궁이란 새 궁중건물을 지을제, 정원에다가 양이정을 세웠는데 청자기와를 올렸다’

고유섭 관장과 그의 제자였던 최순우과장 뿐 아니라 당시 역사학자들에게 이 한 줄은 풀어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이 기록처럼 과연 청자로 어떻게 지붕을 덮었을 것이며, 기와의 형태는 어떠했고, 청자기와를 굽던장소는 과연 어디인지 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인 욕구와 호기심이 팽배해 있었다.

아무리 청자생산이 활발했던 시기였고 왕의 정자를 짓는 일이었다해도 청자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덮는다는 것은 보통 사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용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청자기와가 어디에서 구워졌다는 기록도 전혀 없었다.

개성의 양이정터에서 청자기와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개성시 송악산 기슭에 있는 왕궁터인 만월대 인근에서 청자기와 파편하나가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개성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때 소천경길이라는 총독부박물관직원이 청자편을 채집하기 위해 강진에 내려왔다가 대구 수동리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로부터 청자와편 하나를 입수한적이 있는게 다였다. 전국의 요지에서 청자자기와의 완형은 물론 파편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이것을 두고 ‘세기의 수수께끼’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용희씨 집에서 발굴해 깨끗히 씻은 다음 촬영한 청자기와 조각들이다.
당시 청자기와 전설이 얼마나 학계의 애간장을 태웠는지 한 신문의 기사를 보면 더 충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전설적인 옛 기록은 수많은 관계학자들을 너무 오랫동안 안타깝게 해왔다. 그 옛날 송도(개경) 궁궐건물은 깡그리 흔적을 감춘지 오래다.

실오라기 같은 자료로 만월대 근처에서 청자기와 파편하나가 나타났을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면서 눈부신 빛깔과 무늬에 감동하곤 한다. 그같은 청자의 기와가 한 정자의 지붕을 이루었을 때 그 외관은 얼마나 호화롭고 찬란했을까’<경향신문 1964년 12월 9일>

고유섭의 제자 최순우는 국립중앙박물관 과장이 된 1964년 초 고려청자 기와를 찾아 무작정 강진으로 내려온다. 그의 옆에는 당시 학예관보였던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을 대동하고 있었다.

대구 고려청자 가마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도굴꾼들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후 파괴돼 흔적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침반과 지도만 들고 과거 도요지로 추정되는 언덕을 수없이 오른다. 경찰의 의심을 받으면서 시골 마을을 헤맸다.

그러던 5월 늦은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도 대구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청자파편이 가득담긴 헌 소쿠리를 들고왔다, 소쿠리속을 들여다 본 최과장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하나가 파편무더기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청자기와 파편을 촌부의 헌소쿠리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최과장은 흥분을 감추고 조사단의 정양모 학예관보를 조용히 불렀다. 두 사람은 은밀한 눈짓으로 ‘득망의 대발견’을 기뻐했다고 한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나왔다. 당시 조사단에는 지방대학의 실습학생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어 청자기와 발견사실이 알려지면 조사에도 지장이 있었지만 고가의 귀중한 청자기와가 흩어질 염려가 있어 정양모씨와 둘이서만 알고 서울로 올라 올 때까지 비밀로 했던 일은 잊지 못할 유쾌한 추억”이라고 훗날 최순우 과장은 회고했다.<1975년 5월 10일 경향신문>

당시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촌부는 이용희 전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의 모친 김월엽씨였고, 소쿠리에 청자편을 담아놓은 사람은 막 군대에서 제대한 이용희 실장이었다. 이 실장은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를 나오면 마당에 여기저기서 굴러다니던 청자편을 소쿠리에 모아놓고 있었다.

최과장과 정학예관보는 “색이 좋고 그림이 그려 있는 사기조각들이 집마당을 파보면 많이 나온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사당리 117번지 문제의 초가집으로 달려갔다. 117번지 초가집은 일제강점기때 파악한 100여기의 요지속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였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의 탐문조사 동안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엌바닥과 안마당, 담등에 청자파편이 많이 박혀 있었다. 청자기와인 평와(平瓦) 조각도 눈에 띄었다. 온 집안이 청자파편의 보고였다. 그날 오후에는 우선 집주위를 실측하고 표면조사를 하는데 그쳤다. 4개월 정도 기초조사가 진행됐다.

우선 가정집 내부를 발굴한다는게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시골에는 집안을 파헤치면 부정을 탄다는 속설이 있었다.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사당리 장재문씨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 최과장 일행이 제대한 이용희씨를 불러 정중히 요청했다.

집안을 발굴할 예정이니 협조를 해달라는 것이였다. 이용희씨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상의를 들였다. 그랬더니 부모님은 “네가 장남이니 잘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힘을 실어 주었다. 가족 동의는 그렇게 이뤄졌다.

그해 9월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해가 뜨자마자 이용희씨의 집 마당에 트렌치(시굴갱)를 파기 시작했다. 첫 곡괭이 끝에 청자수키와 하나가 벌렁 뒤집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찾아왔던 청자기와를 찾은 것이였다.

그해 발굴에서 조사단은 500편도 넘은 청자기와와 파편, 거의 완형에 가까운 10여개의 각종 청자기와(수키와 암키와 수막새 암막새기와등)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순우 과장은 “이용희씨의 집이야 말로 고려청자문화의 전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했다. 그해 발굴은 보름 동안 계속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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