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있어서 훼예포폄(毁譽褒貶) 지나치면 결국 문제”

“매사에 있어서 훼예포폄(毁譽褒貶) 지나치면 결국 문제”
몸에 혹나고 식음전폐... 1956년 8월 1일 끝내 숨져
이대통령 필사적 노력불구 백약이 무효
박제만들어 경무대에서 보관 ‘강한 집착’
2012년 7월 7일 부산 국립수산과학원서 일반공개

지난 7일 부산의 국립수산과학원이 공개한 강진거북의 박제모습이다. 죽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하고 있다고 한다.
1949년 강진만에서 잡혀 부산 중앙수산시험장으로 옮겨간 후 ‘강진거북’은 태평성대를 누린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던 1956년 7월초 어느날, 중앙수산시험장의 수의사가 거북의 몸둥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목과 다리에 혹이 생기기 시작 한 것. 거북은 조금씩 음식을 멀리하더니 결국 하루 12㎏까지 먹어 치우던 조개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중앙수산시험장이 난리가 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거북’이 혹시 잘못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추궁은 물론 전국에서 쏟아질 비난을 감수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강진거북의 건강상태는 즉각 해무청에 보고됐고, 그 아찔한 소식은 경무대에 긴급상황으로 올라갔다. 강진거북이 몸에 혹이 돋아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했다. 당시 정치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그해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가 투표 몇 일 전에 사망하여 유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됐으나 그의 정치적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 지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운명과 함께하고 있다고 소문난 거북이 죽는다는 것은 이대통령에게 상상할 수 없는 악재였다.

이대통령은 즉각 “외국 수의사로 하여금 수술케 하라”고 지시했다.<동아일보 1956년 8월 1일자> 7월 23일 서전병원 병원장과 외과의사, 미국인 수의사 4명이 중앙수산시험장으로 급파됐다.

서전병원은 6.25이후 유엔군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 서면에 들어섰던 주한적십자병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최고 의료진이 있는 곳이였다. 강진거북의 상태는 비관적이었다.

1956년 7월 30일 서전병원외과과장과 미8군소속 군의관 크린트대위가 진찰을 한 결과 병명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이 나왔고, 거북의 전체적인 건강상태 또한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중태라는 최종 진단결과가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는 의료진들이 병든 거북을 어떻게 치료할지 이대통령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서전병원측은 거북수술도중 거북이 죽을 경우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이대통령의 최종 지시를 기다렸다고 한다. 의료진은 모두 미국인이였고 상대는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거북이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든 강진거북을 살리려고 시도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강진의 거북은 8월 1일 끝내 숨지고 만다. 몸에서 작은 혹이 발견되고 식음을 전폐한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정문기 당시 한국수산기술협회장은 <동아일보 1966년 6월 18일>에 기고한 글에서 “이대통령이 거북이 죽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며칠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거북이 죽은 후 4년뒤인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호사가들은 ‘거북이 죽은 후 이대통령의 운도 끝나갔다’는 말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 7일자 1면 ‘여적’이란 란에 실려 있는 글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은 8년전 강진에서 잡힌 거북의 죽음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질책하고 있다.

‘신령스런 거북이 주역의 근원이 되었고, 기린이 나타나면 성인이 나고 여우가 울면 동네가 망한다고 한다. 까치가 짖으면 길사가 있고 까마귀가 짖으면 흉사가 있다고들 한다. 이와같이 동물에게 인사(人事)를 상징시키는 것은 한낱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너무 집착하면 딱한 때가 많은데 강진거북 일이 꼭 그러하다. 거북이 잡힐때만 해도 굉장한 경사라고 떠들어 댔으니 이번에 거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결코 유쾌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매사에 있어서 훼예포폄(毁譽褒貶. 칭찬하고 비방하는 말과 행동)이 지나쳐서는 안된다’   

2012년 7월 7일, 부산 기장군 기장읍 국립수산과학원 내 수산과학관에서 한 마리의 바다거북 박제 표본이 일반에 공개됐다. 그때 그 강진거북이였다. 강진거북은 죽은 후 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박제로 만들어 졌다.

이대통령은 박제를 경무대로 옮겨 곁에 두고 봤다.이대통령이 강진거북에 얼마나 많은 애착이 있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북박제는 이대통령 재임중 다시 부산수산시험장(현 국립수산과학원)으로 보내져 오늘날까지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점잖지만 당당한 자태, 근엄한 눈매가 당시 전국을 주름잡았던 강진거북의 위풍을 짐작케 한다.
 
이 말못하는 거북은 강진 도암의 죽방망이에 잡혀 부산의 물통에서 죽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60년을 뛰어넘는 역사의 조각들이 우리를 잠시 추억에 젖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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