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車 할아버지 차종률씨 해방 후 상경

서울 종로구 한복판서‘남양호텔’운영

아마도 새해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관심받는 미국인은 2월쯤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할 빅터차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전의 미국대사들이 김치찌개와 불고기를 먹으며 양국의 우의를 과시하면서 일과를 보내고, 맥주와 치킨을 즐기며 한국인들과의 친밀감을 과시하던 일상과는 아주 다른 시간을 보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북핵문제가 모든 미국인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상황에서 그는 갈수록 첨예해 질 북핵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분출하는 핵심 인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본지에 보도했듯이(2017년 12월 14일자). 빅터차는 아버지가 강진 출신이며 장인(김식 전 농림부장관) 또한 강진 출신이다.

특히 군동에서 태어난 빅터차의 부친 차문영(1932~2005)선생은 한국 유학생 출신으로는 뉴욕에서 제일 먼저 비즈니스에 진출한 사례로 평가 받는 사람이다. 빅터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와 부친의 행적을 따라가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편집자 주

군동면사무소 앞에서 가계 운영하다 서울로 이주
군동중 다니던 아들 차문영씨 경기중, 경기고 졸업


오는 2월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해 올 빅터차의 모습이다.
빅터차의 아버지 차문영선생은 1932년 군동면 평리에서 차종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종률씨의 형님이면서 그의 큰아버지가 ‘남도의 호랑이’로 불리웠던 차종채 전 군동면장이다. 군동면사무소앞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차종률씨는 해방 후 서울로 이주했다.

당시 군동중학교에 다니던 차문영씨는 부친을 따라 올라가 곧바로 경기중학교에 입학한다. 군동중학교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서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명문이었던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홍구 전 총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이 경기고 동기 동창들이다.

강진에서 상점을 정리하고 올라간 부친은 서울 종로에서 남양호텔이란 숙박업을 했다. 5층짜리 큰 건물이었다. 정관계 유명인사들과 연예인들이 남양호텔을 즐겨 애용했다. 당시 고향에서는 친형님인 차종채 선생이 자금을 대주어 종률씨가 호텔을 구입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빅터차의 아버지인 차문영선생의 젊었을 적 모습이다.
한때 남양호텔은 강진 사람들의 아지트로 통했다. 강진 사람들이 서울에 가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남양호텔이었다. 그곳에서 그냥 며칠씩 살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강진사람을 만나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는게 순서였다. 그때마다 차종률선생은 거의 실비로 강진사람들에게 방을 제공했다고 한다.

특히 강진의 기관장들이 서울에 올라가면 남양호텔에 들려 강진출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일상적인 코스였다.

남양호텔 사장 차종률씨는 굉장히 멋쟁이었다. 당시 남양호텔에서 그를 자주 만났던 강진읍 출신 김홍배씨는 “항상 검은 양복과 반짝 거리는 검은 구두를 즐겨 착용했고, 맛집은 찾아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고 새 영화가 들어오면 반드시 그날 봐야 직성이 풀린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차종률씨에게는 인영씨란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서울에서 아주 잘나가는 젊은이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그러니까 남양호텔 초창기 시절 경무대를 자유롭게 드나들고, 재경 검사장들이나 종로경찰서장을 비롯한 중심가 경찰서장들이 모두 인영씨와 긴밀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강진읍의 한 주민에 따르면 “6.25 전쟁 전 이야기 인데 인영씨가 서울시내에서 술을 마시다 누구야 나와 하면 꽤 유명한 권력자들이 달려오곤 했다”고 웃었다.  한가지 일화가 있다. 1962년초 남양호텔에서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신상옥 감독이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다.
 
차종채 (빅터차의 큰아버지)
당대 최고의 화가 이당 이은호 화백이 그곳에서 최은희씨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당선생은 남양호텔에서 강진에 사는 소죽 김현장 선생을 만났다.

이당선생은 김현장 선생의 증조할아버지인 조선후기 비장(전라 관찰사 비서실장) 김제진의 초상화를 강진까지 내려와 그려주었던 명인이었다. 이당선생은 강진에서 그림을 그려준 기억을 떠올리며 남양호텔 로비에서 소죽선생에게 그림을 한점 선사했다고 한다.

나름대로 평온했던 차문영씨의 집안에도 6.25 전쟁과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남양호텔은 철시상태가 됐다. 1.4후퇴때 전 가족이 강진으로 내려와 피란생활을 했다.

차문영 선생과 동년배인 강진읍 장한식(85)선생은 “차문영씨가 1.4후퇴때 가족들과 함께 강진으로 피란을 왔는데 그때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차문영 선생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많은 시기였다. 차문영선생은 미국에 가서도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 합격해 그곳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생활도 아주 열심히 해서 미국사회에서 한국 유학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학위를 마친 차문영 선생은 1961년 한국에서 공직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귀국했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1960년대 초 서울시 종로구 중심지에 있던 화니백화점의 모습이다. 차문영선생이 운영하던 남양호텔은 화니백화점 바로 뒷쪽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공직자들을 하나하나 퇴출시키고 있는 시기였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차문영이 공직에 들어갈 구멍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부친과 자신의 앞날에 대해 깊은 상의를 했다. 그랬더니 부친은 “다른 생각말고 그냥 남양호텔이나 경영하면서 살아라”고 했다.

몇날 며칠 부친의 권유를 놓고 고민하던 차문영 선생은 결국 미국행을 다시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해서 차문영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그가 내린 결정은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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