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다”

군청 정보통신계장으로 퇴직한 강춘원씨가 자신이 공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계기를 마련해준 김정길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친척 어르신 소개로 처음 인연 맺게 돼
직장 잡지 못하며 방황하던 나에게 조언과 격려
정보통신기사 자격증 계기, 군청 공직자로 근무
공직자로서 가져야할 자세와 일처리 법 등 조언


나는 독실한 불교신자이다. 도암 용문사 총신도회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고 요즘은 고성사에서 사찰의 일을 도우며 지내고 있다. 젊은 날 나는 33년간 공직생활을 했고 퇴직 이후에는 영아전담 어린이집을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다.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사람인 내가 지금까지 7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꼽는다면 전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정길 장관님을 꼽고 싶다. 이분은 내가 젊은 시절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그야말로 은인과 같은 분이다.

내가 공직에 입문한 것은 1974년 무렵이었다. 공직에 입문하기 전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다. 이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해답을 찾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기도 했지만 나와 맞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김 장관님과 처음 알게 된 것은 우리 집안의 당숙 어르신때문이었다. 김 장관님과 당숙 어르신이 친분이 두터웠고 당숙 어르신은 나에게 장관님을 소개해준 것이다.

당시 공직에 계셨던 김 장관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나를 안타까워 하셨고 공직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러던 중 내가 김 장관님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장관님이 검사시절에 장흥에 부임했을 때였다. 당시 장흥지청 3호 검사실에서 근무하셨는데 이때 거리상 가까웠기 때문에 자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다.

장관님은 나를 볼때면 항상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꼭 좋은 결과가 나온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장관님 자신이 어려운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검사로 근무하면서 느꼈던 점을 나에게 해주신 이야기였다.

장관님의 이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여수화학단지와 순천도로공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여수화학단지에서의 일은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김정길 전 법무부 장관
순천도로공사의 경우에도 이 곳에서 근무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강진군청에 통신기사가 1명 공석이 되어서 채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에 장관님이 해주셨던 이야기와 공직생활을 성실히 하신 장관님을 보며 나도 공직생활을 해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군청에 입사를 하게 됐다.
 
당시에 나는 통신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해 군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나를 안타까워하셨던 김 장관님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는 나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다.

그러면서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마음가짐과 일처리 방법 등을 알려주기도 하셨다. 장관님이 해주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나는 임시직으로 있던 중 6개월만에 당시 8급시험을 치르게 됐고 당당히 합격해 정식 직원이 됐다.

8급 시험 합격후 나는 가장 먼저 장관님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드렸다. 장관님은 자신의 자식 일처럼 나의 합격소식을 듣고 기뻐해주시면서 “장하다, 정말 잘했다.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이 있구나”라는 말씀과 함께 격려해주셨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때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해 정년퇴직할때까지 33년동안 정보통신계에서 근무했고 계장으로 퇴직했다. 퇴직이후 할 일을 찾다가 아이들을 보육하면서 지역사회에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공직에서 퇴직한 이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용문사 신도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시절 주위에서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는 남매를 알게 됐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부모님이 안계시고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이에 나는 학비를 지원해주기 시작했고 대학교 다닐때까지 학비를 계속해서 지원해주었다. 나의 학비 지원덕분인지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이들은 40대 중반의 성인으로 잘 자라주었고 현재는 학원 원장과 대학교 강사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설과 추석 명절이면 나를 찾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며 명절 선물과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또 용문사 안내 간판과 사찰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을 내 사비로 설치하기도 했고 고성사에도 생필품과 온풍기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 강진불교대학 13기 학생회장과 청송회 회장, 재강장흥고동문회장 등을 맡아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다지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전환점이 됐던 분을 꼽으라면 역시 김 장관님이다. 내가 만약 당숙 어르신을 통해 장관님을 뵙지 못했다면 공직생활을 꿈꾸지도 못했을 것이고 좋은 기회가 왔더라도 날려버렸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 하던 내가 당당히 공직에 입문했고 성실히 33년간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김 장관님의 조언과 격려덕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5년경 현직에서 퇴직하셨지만 김 장관님은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우상이면서 생명의 은인과 같은 소중한 인연이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바라고 내가 죽을 때까지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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