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는 원래 강진현, 고금도서 유배 살았던

이도재가 1896년 행정개편때 완도군 독립

이도재 유배풀려 한양 갈 때 강진읍 사람‘김제진’이 가마 제공
전라관찰사 된 이도재, 김제진 불러 비서실장(비장) 파격 대우


최근 개통된 장보고대교 입구에 가면 눈길이 가는 작은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에는 장보고대교를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교량, 역사와 이야기를 잇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래쪽에는 강진현의 옛 지도가 새겨져 있다. 지도에는 가우도와 죽도, 마도진, 칠량면 등 눈에 익은 강진 지명도 눈에 띤다.

비석은 장보고대교가 옛 강진현의 역사와 이야기를 잇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며 다리의 개통은 옛 역사를 다시 잇는 의미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완도의 동쪽 섬, 그러니까 고금, 약산, 신지, 청산도 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금의 강진군과 함께 강진현이란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6년 행정구역 개편때 완도지역이 독립군이 된다. 그 역사 속에 이도재<사진>란 사람이 있었다. 완도군은 이도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그가 고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집을 복원시켜 놓았고, 완도읍 죽청리에는 그의 공적비를 세웠다.

이도재는 또 지금의 강진과도 뗄수 없는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강진읍에서 가장 큰 한옥중 비장네란 집이 있었다. 비장이란 지금의 도지사 비서실장 직책이다. 강진에서 조선말 비장이 탄생했던 과정을 따라가 보자.

원래 이도재라는 사람은 경상북도·평안남도·충청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했던 사람이다. 잘나가던 이도재는 1886년 사대수구파에 의해 고금도로 유배됐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면서 극적으로 유배 해제통보를 받았다.

고금도에서 해배 통보를 받은 이도재는 도암 해창을 통해 육지로 돌아왔다. 한양으로 올라가야 할 일이 급했다. 수소문을 했다. 자신을 한양으로 빨리 데려다줄 사람을 구한 것이다. 몇사람이 도암 만덕리의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이도재는 사람을 보내 만덕리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렸으나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배된 사람이 노자돈을 구하려는 것 정도로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그만큼 고금도 등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완도군 고금면소재지에 복원돼 있는 이도재 유배지 유적이다.
낙담하고 있던 이도재에게 추천이 들어왔다. 누군가 강진읍의 김제진을 찾으라고 귀뜸해준 것이다. 이도재는 즉시 김제진을 찾아 자신의 처지를 알렸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김제진은 급히 움직였다.

김제진은 8패교자를 준비했다. 교자(轎子)란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는 가마다. 보통 교자는 4패교자가 일반적이었다. 4패교자는 4명이 짊어지는 교자이고, 8패교자는 8명이 짊어지는 가마였다. 김제진은 8패 교자 뒤에 다시 8명의 짐꾼을 다시 딸려 보내 수시로 교대하며 이도재를 한양까지 모시게 했다.

강진에서 한양까지 가마를 타고 가는 길은 보통 보름이 걸렸으나 김제진이 마련해준 8패교자와 짐꾼 덕분에 이도재는 일주일만에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도재는 잠시 군국기무처의원(軍國機務處議員)이란 직책을 맡았다가 곧바로 전라관찰사로 부임한다. 이도재는 전라관찰사에 부임하자마자 ‘강진의 김제진을 불러 올리라’고 했다.

강진에서 계장급으로 근무하던 김제진이 허겁지겁 전주로 올라가자 관찰사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비장은 귀향해서 고향 강진읍에 고래등같은 한옥을 짓고 살았다. 사람을 제대로 대접한 결과였다. 장보고대교가 강진현의 역사를 잇는 이야기는 이것 외에도 많다. 재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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