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멘토 역할해주신 고마운 사람

동국대 재학시절 다다문학동인회서 활동하며 만남
현실에 부딪쳐 고민할 때마다 조언 아끼지 않아


오대환 시인이 자신이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조언을 해주셨던 박제천 문학아카데미 대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센티멘탈한 문학 소년이었다. 전주 북중학교때 교지에 해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독후감과 동인지 종각 발간당시에 신석정 선생님 지도를 받아 공보관 시화전 참가한 적이 있고 고등학교 때 고창 모양성에서 고창 군민의 날 백일장 시 부문에서 장원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내가 1964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을 하고 보니 친구들이 대부분 문인 지망생이었고 재학 시절에 문인 등록을 끝마치는 게 관행이었다. 나는 학과 수업에 충실하는 한편 창작극회와 다다문학동인회에 참가했다. 다다문학동인회는 1년 선배인 박제천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가 만든 것이었다. 

내가 1968년 제대 후 복학을 했을 때 박 대표는 1966년 현대문학 7월호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육군 사병으로 입대한 뒤였다. 박 대표는 3여년의 군 생활을 제2의 습작기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시간이란 언제나 갖고자 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 한 마디가 다다문학동인회의 다다정신을 되집게 했고, “고단한 생활과 관계없이 내 안에 있는 작품들을 다시 불러 깨운다”는 깨달음으로 단막 희곡 ‘침실의 새’ ‘이상의 시계’ 등을 발표했다.

대학 4학년 2학기가 되자 급우 거의가 교생실습을 나가는 때, 나는 연극의 실제에 체계적인 경험을 쌓기 위하여 탈 극회에서 칼비트링거 원작 은하수를 아시나요 연출을 맡고 연습을 하고 모두 공연준비에 열중을 한 덕분에 무사히 공연을 마치게 되었다.

소극장 운동이란 자비량으로 주머니 돈을 털어서 제작 진행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실험 정신으로 상업주의에 도전한다는 저항은 하늘을 찔렀다.

졸업을 전후로 급우들  거의가 교생 실습을 했던 학교나, 동국 재단에 속한 학교 등으로 선생님이 되어 나가는 동안에도 나는 차기 작품으로 헨릭 입센의 「유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 연극 연습이 저녁에 있기 때문에 낮에는 탈 극회가 있는 YMCA 종로 근처의 음악 감상실 쎄시봉, 디쉐네, 르네쌍스를 전전 하다가 식사도 거른 채 밤 연습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는 고단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여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원했던 직장에 취직은커녕 실망만 안겨 드리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과 당장 생활에 어려움이 가중되자 취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MBC TV 드라마 PD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 때 박 대표를 찾아가 심경을 토로하자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 때가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권면과 월간 학원 편집부를 추천해주셨다.

박제천 문학아카데미 대표
학원 편집실 일은 그런대로 적응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잠깐 월간 대중잡지 ‘청춘’ ‘로맨스’를 전전 하며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된 셈이다. 그 때  박대표는 시단 활동을 10년을 스스로 정리하고자 첫 시집 ‘장자 시’를 엮어 내면서 “실패까지도 수확 할 수 있는 게 바로 시의 길”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내 첫 아기가 출산이 가까울 때 첫 시집 ‘장자 시’가 나왔다. 겹경사가 됐다. 아이 이름을 이야기 하다가 박 대표로부터 옥돌 진(璡)자를 받아 큰 아들 이름을 오세진이라고 짓게 됐다. 박대표의 아들 박진호의 진자도 같은 진자다. 박대표의 아들 이름 중 한 자를 준 셈이다.

친 형제와 같은 정리로 직장 문제, 아들의 작명까지 맡아 해결해 주었으니 박대표의 첫 시집 「장자 시」출간 되었을 때 뛸 듯이 좋아 하며 출판 기념회를 주재하는 것은 마음  속에서 울어 나오는 서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 후 ‘경영과 마케팅’ 편집장을 거쳐 한국유통 이사가 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목원대학 신학대학원을 입학하여 1982년 3년 과정을 마치게 되는데 졸업 논문의 내용을 교회 문화가 갖는 의미와 성장 동력이 되는 실천 신학 쪽으로 잡고,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나 절기 행사에 드라마를 접목 할 수만 있다면 교회예술(음악, 미술, 문학)을 역동적으로 꽃 피울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자료가 전무이고, 교회 안에서 연극을 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허용이 안되는 전통 보수적인 풍토와 논문을 쓴다 해도 심사해줄 교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실마리가 잡히지를 않고 시간만 허비하였다.

포기하고 다른 주제로 옮겨 가야하는가 고민할 때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 때가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박 대표의 말이 생각났다. 그 때 문예진흥원 자료관장이던 박대표를 찾아 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내어준 자료가 연극사전이었다. 논문의 마스터 키를 찾은 셈이다. 비로소 교회극, 예배극의 정의와 사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극의 의의와 활성화 방안’이라는 초유의 논문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초원배광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서울, 인천, 부천, 헝가리를 거쳐 강진에서 목회를 하게 됐다. 2012년 영랑생가 옆에 시문학파 기념관이 개관을 하면서 50여년 만에 은사인 신석성 선생님의 영상으로 뵙고 “고단한 생활과 관계없이 내 안에 있는 작품들을 다시 불러 깨운다”는 박 대표의 말대로 내 안에 있는 불씨들을 끄집어 내 시를 짓기 시작했다. 같은 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해 ‘꽃씨 여행’으로 입선했다.

힘을 얻어 동대 도서관 등을 찾아 재학생 때 발표했던 희곡과 그동안 발표했던 시와 수필 외에 강진을 노래한 시를 묶어 내가 찍은 사진을 곁들여 ‘긴 동행+사랑’을 문집으로 냈다. 문집 출판을 계기로 2014년 12월 시문학파 기념관에서 화요일 밤 초대 손님에 32번째로 초대되기도 하고 ‘기독교 타임즈’  추천 시도 집필했다. 

나는 중앙 문단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었다. 2014년 서울 종로에 있는 계간 시 종합지 ‘문학과 창작’에 시를 있는 대로 다 챙겨서 문을 두들겼으나 어렵겠다는 말만 들었다. 1년을 더 준비하며 시를 보낸 결과 ‘동심재’ ‘겨우살이’가 처음 게재됐다. 2016년에도 2편의 시가 게재됐다.

2017년 3월에는 ‘문학과 창작’ 원고 청탁서를 처음 받았다. 진정 내 시의 지경이 넓어지는가 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 시 ‘촛불의 나라’ ‘그냥 가’가 게재됐다. “좋은 작품 감사 합니다. 건강 건필 외치는 나이가 되었소. 나날이 좋은 날 되소서”. 내가 5모작 인생, 문학소년 극작가, 기업인, 목사, 시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그 마디마다 멘토가 되어주신 박대표를 잊을 수가 없다. 일일불작 일일불식(一日不怍 一日不食)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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