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영파리에 있는 금강사란 사당에는 김억추장군과 함께 이순신장군이 함께 모셔져 후손들이 나라를 지킨 두분의 뜻을 기리고 있다. 사당앞에는 김억추장군(우측)과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조선시대 三星장군으로 명량해전 참전

이순신과 미묘한 갈등, 음해기록 많아

왜란후 진주목사등 고위관직 두루 섭렵

김억추장군의 임진왜란승리 공적 입증

김억추 장군은 장흥부사로 재임하던 중 1597년 7월 25일 전라우수사 발령을 받고 해남우수영으로 부임한다. 명랑해전이 벌어지기 딱 3개월 전이었다.

전라우수사는 정3품에 해당되는 벼슬로 요즘 계급으로 중장(쓰리스타) 정도의 위치였다.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종2품)은 대장급이였기 때문에 김억추장군 보다 한 계급 위였다.

김억추장군이 전라우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 서남해안 일대는 긴박한 전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경상도에서 밀려온 조선수군이 전라우수영에서 배수진을 쳤다. 조선의 명운이 이곳 우수영의 전세에 따라 좌우될 형편이었다.

이순신의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전쟁에 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길만을 찾고자 하면 죽는다)’란 말이 이때 나왔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은 전라우수사가 되어 내려온 김억추장군을 그렇게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8일자 난중일기에서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 사람이다’고 폄하했다. 만호란 조선시대 해상전략기지를 지키는 부대단위를 말한다. 요즘으로 치면 중장계급의 장군을 대령정도의 항구경비대장정도에 비교한 것이다.

뒷일을 더 살펴보자. 1597년 10월 26일 새벽, 우리나라 해전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적선이 성냥갑처럼 부서지며 울돌목 물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장군이 13척의 배로 왜적선 333척중 31척을 격침시킨 사상최대의 해전이었다.

김억추장군은 이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적선을 물리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장수로 전해 내려온다. 김억추의 철쇄사용은 여러가지 기록이 있다.

18세기 중반에 나온 이중환의 ‘택리지’에 철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뛰어난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일본 군선을 격침시켰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억추장군의 후손들이 펴낸 <현무공 실기>에도 장군의 철쇄사용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구한말의 회정 김기정(1876-1968)이 쓴 <이순신 세가. 1910년>에도 김억추장군의 철쇄가 등장한다. 또 진도군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1948년에 세워진 조응량의 비문에도 그가 명량해전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철쇄(鐵鎖)작전으로 대승하는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었다.

1904년 일본해군의 소이번 오가사와라 중좌가 쓴 '일본제국 해군권력사 강의'라는 책에는 조선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늘어뜨려 일본배를 침몰시켰다고 전하는 등 일본학자들 상당수가 쇠사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에 철쇄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훗날 일부 사가들은 철쇄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는 근거로 난중일기를 얘기하곤 한다. 난중일기에 그런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또 김억추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는 기록도 했다<1597년 9월 11일 난중일기>. 진실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김억추가 명량해전 이후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여주목사, 진주목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등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다는 것이다. 이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다’고 지적한 이순신의 사람 평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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