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형편에 방황하던 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해준 은인

차영수 한국대학역도연맹 회장이 학창시절 방황하던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고 윤기석 목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교진학 포기하던 나에게 진학 조언
당시 나의 특기 살려 전남체육고 진학
70년대부터 강진서 20여년간 목회활동
민주화운동에도 힘써, 힘없는 사람들 도와


청맹과니와도 같은 아둔함으로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에 온 몸으로 흔들리던 시기,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 못하고 믿음도 썩 내세울 만하지 못했음에도 머릿속에 담아두고 내내 되새겼던 한 줄의 성경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 하리로다”

자칫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질풍노도의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희망의 끈이 되어 나를 일어서게 한 주문과도 같은 광명의 말씀이다.

나는 ‘진바뜰’이라 불리던 강진읍 장전마을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길고 긴 겨울의 보릿고개처럼 작은 시골 마을 서민들의 삶이란 거칠고 빈곤했다. 나의 청소년기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직업이 없던 선친과 가산마저 궁색했던 우리 집은 얼마 안 되는 논과 밭에 의지해 어렵게 살아갔다. 다섯 형제와 부모님이 함께 살아가던 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염려와 걱정의 연속인 삶이었다.
 
형들과 누나들은 빈궁한 가정형편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이를 지켜보는 부모님은 안타까움으로 애를 태우셨다. 막내로서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자란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던 성격과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춘기 시절의 야망은 가난이라는 벽을 만나 방황하기 시작했다. 점차 반항적 성격으로 변하고 부모님 말씀에 거역하며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일쑤였다. 온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막내아들이 변하는 모습에 가슴을 치며 우셨던 어머니는 그럼에도 절대 나를 나무라시지 않으셨다.

교회 권사였던 어머니는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못난 아들을 위해 꾸준히 눈물로 기도해 주실 뿐이었다.
나의 방황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정점에 달했다.

빈한한 집안사정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무력감과 패배감이 마음에 가득 차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런 나를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울면서 나를 강진읍교회 목양실로 데리고 갔다. 목양실에는 윤기석 목사님이 앉아계셨다.

고 윤기석 목사
윤 목사님은 이미 나에 대한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터라 측은한 눈길로 나를 맞아주셨다. 그리고 내 두 손을 잡으시며 기도해주셨다. 체구도 별로 크지 않으시고 깡말라 병약하게 보이셨던 목사님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강한 모습으로 힘 있게 기도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움과 걱정 없이 갈 길을 가라는 성경구절을 담은 기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마음이 큰 위로와 안식이 되었다. 그리고 기도를 받은 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며 내 생활도 점차 변화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접고 특기를 살려 전남체육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전공을 쭉 이어 조선대 체육과에 입학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특히 대학시절에는 총학생회 임원을 맡아 학생회를 이끌어 가며 체육계 선 후배간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이때 함께했던 인연들이 지금 우리나라 체육계 지도자들로 성장해 활약하고 있으니 나도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 봉사한 셈이다.

청빈하고 신념 굳은 삶의 모습으로, 나의 가장 험난한 시기 지지대가 되어주신 故 윤기석 목사님은 도암면 항촌마을 출신으로 70~80년대부터 강진에서 20여년 목회활동을 하시며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어두운 시대에 큰 등불을 밝히셨던 분이다.

목회활동을 하시면서도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사랑을 베푸셨던 목사님은 강진읍교회를 거쳐 간 목사님들 중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으로 평가되고 있다.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 수많은 교인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시던 목사님은 1997년 가을이 접어드는 9월에 6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잊지 않고 전화를 주시며 멘토 역할을 마다 않으셨던 윤기석 목사님. 가야할 길에 소중한 등불을 밝혀주셨기에 힘들 때 무릎이 꺾이지 않았고 울고 싶었던 날에도 꿋꿋이 울음을 삼킬 수 있었다.

인생은 거친 산과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일의 연속이지만 어린 시절 철없던 소년의 손을 잡고 단단한 목소리로 기도해주시던 윤목사님의 존재는 인생의 혹한을 버티는 따뜻한 한 조각의 불씨가 되어 지금까지도 내 속에 자리하고 있다.

절절한 어머니의 기도와 깊게 닫힌 마음을 열게 했던 빛과 소금 같은 성경 말씀, 그리고 아직도 귓전에 쩌렁쩌렁한 윤기석 목사님의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흐트러짐 없이 잘 살아갈 것을 매번 다짐한다.

가장 힘들고 방황했던 시기, 갈 길을 틔워주신 은인 같은 분, 고(故) 윤기석 목사님!
어느덧 그분이 가신지 20년이 되었다. 가을에 소천하시었기에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즈음엔 언제나 그리운 그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그 분은 아니 계시지만 도암 항촌 선영에는 목사님의 묘소가 남아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묘소에 들러 미처 전하지 못한 그간의 많은 이야기들을 두고두고 다시 전하리라 생각해본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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