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를 데리고 오라”

“김억추를 데리고 오라”

강진읍 영파리에는 김억추장군과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금강사란 사당이 있다.
평양으로 피신떠난 선조 김억추 가장 먼저 찾아

1597년 전라우수사 맡으며 이순신장군과 운명적 만남 
 

김억추는 힘쎈 장군이었다. 전형적인 무신의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어릴 때 고향인 작천 박산의 뒷산에서 병영 수인산 정상을 향해 화살을 쏘면 수인산 중턱의 노적봉에 꽂혔다고 한다.

그만큼 활쏘는 기술과 힘이 좋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과거에 급제하던 해(1577년) 선조임금이 당시 병조판서이던 율곡 이이에게 김억추의 활쏘는 능력을 시험해 보라고 하자 김억추 장군은 화살 3개를 표적에 정확히 맞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적이 살의 꼬리부분 이었다. 표적으로 화살의 꼬리를 놓았는데 3개를 정확히 그곳에 맞힌 것이다. 이밖에도 김장군의 활쏘는 기술과 근력이 대단히 좋았다는 것은 많은 기록에서 보이고 있다.

김억추 장군의 근력은 명랑해협에서 왜선을 격파하면서 철쇄를 자유자재로 움직인 대목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철쇄는 무거워서 다른 장군들이 들어올리지 못했으나 김억추 혼자서만 쇠사슬을 풀어주거나 당기면서 마치 조총 한자루를 다루듯했다.<울돌목 승리- 김억추장군. 강진문화재연구소 간>’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표현들 역시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김억추장군이 다른 장군들 보다 무예가 출중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예와 힘을 함께 겸비한 무신은 난세에 빛을 발하는 법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김억추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15년 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김억추장군은 사헌부감찰과 도총부도사, 무이보만호, 제주판관이나, 진산군수, 순창군수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김억추장군의 능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해 선조임금이 평양으로 피난을 가면서 김억추장군을 가장 먼저 찾았다. 김억추가 순창군수로 재직중일 때다.

선조임금은 ‘김억추에게 급히 명령을 내려 역마를 번갈아 타고 올라와서 임금이 탄 수레 뒤를 따르도록하라’고 했다. 김억추는 전갈을 받자마자 밤과 낮을 쉬지 않고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고 한다.

김억추는 그곳의 방어사가 되어 효과적으로 임금이 피신한 평양을 지켜냈다. 김억추는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평안남도 안주목사를 겸한 방어사가 되는등 무신으로서 입신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나이 44세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억추장군의 행로는 그렇게 탄탄하지만은 않은 세월이 펼쳐진다. 안주목사를 맡을 때 함경남도 갑산전투에서 왜적에게 패해 사헌부로부터 퇴출압력을 거세게 받았다.

결국 김억추는 관직을 박탈당하게 되지만 백의종군하면서 전공을 세워 1596년 2월 장흥부사로 오게된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이다.

왜적이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며 조선수군을 격파해 해남까지 쳐들어 올때였다. 김억추는 1597년 7월 25일 전라우수사가 되어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던  전라우수영으로 간다.

이때 이순신과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이순신은 명랑해전을 통해 김억추장군을 역사에 화려하게 부각시킨 주인공이면서도, 한편으로 김억추 장군을 역사에서 두고두고 폄하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둘 사이에는 무슨일이 벌어졌을까.<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