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일보
기획특집심층취재
강진만 생태공원 일대는 강진 역사의 보물 창고다 <2>목리마을에서 남포마을까지남포, 강진의 영원한 항구… 문물과 인물 오갔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8.03  14:17:0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삼국시대부터 제주로 오가는 오랜 관문
남해안 해산물 집산지, 전국으로 유통

   
탐진강 하구와 강진만이 만나는 곳에 광활한 갈대밭이 조성돼 있다. 강진군은 이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오밀조밀한 데크길을 조성했다. 갈대밭 주변에 강진만과 강진의 역사향기가 가득한 스토리텔링이 산재해 있다.
남포 포구

남포는 강진만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바다에서 각종 화물을 육지로 운송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남포는 오래전부터 남해안 지역 섬과 거미줄같은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포에서 내린 수산물은 강진읍 보은산 서쪽 끝자락인 시끄테를 통해 영암, 목포, 광주 등지로 곧바로 나갈 수 있다. 남포는 큰 포구였다. 70년대 초반 마을가구수가 300호가 넘었다.
 
남포에는 유명한 도방(대형 유통업자)들이 많았다. 남포의 도방들은 돈을 제때 잘 계산해 주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배들이 끊임없이 들어왔고, 남포에는 바닷고기가 늘 넘쳐났다. 이렇게 남포마을로 들어온 해산물은 남포사람들을 통해 전남지역 곳곳으로 팔려나갔다.

강진관내 각 5일시장의 모든 어물전은 남포상인들이 장악을 했고, 인근 장흥, 영암, 해남, 영산포까지 남포 상인들이 왕래를 했다. 그러나 70년들어 바다의 수심이 더 이상 배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얕아졌다. 요즘에는 1~2톤 사이의 작은 고깃배들이 바다를 오가고 있다.

추자도 맛이 그대로~‘남포멸젓’

강진읍 남포마을은 멸젓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래전부터 남해안 지역 수많은 섬과 교통망이 형성된 곳이라 섬에서 모여드는 수산물을 많이 취급했고, 특히 추자도는 남포마을과 직거래를 하다시피하며 멸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추자도의 가장 중요한 멸젓 소비처가 바로 이곳 남포마을이었다. 과거 강진만을 통해 대량으로 멸치가 운반될때는 남포마을 대부분이 멸치젓을 판매할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

요즘 남포멸젓은 주로 경남 남해에서 운송해 온다. 보통 7월에 담궈 10월에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남포멸젓은 해남 땅끝에서 가져온 천일염만 사용하고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따뜻한 날씨 때문에 독특한 맛을 자랑한다. 예전 이맘때면 각 가정에서 생멸치를 구입해 젓갈을 담는게 큰 행사였으나 지금은 많이 사라진 풍경이 됐다.

남포마을 사랑한 다산선생의 노래

다산선생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강진지역에 대한 다양한 애정을 표시했는데 그중 남포에 대한 애정은 매우 큰 것이었다. 남당포는 남포의 옛 이름이다. 당시 강진에서 남당포의 지리적, 경제적 역할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산선생은 남당포를 노래한 여러편의 한시를 남겼는데 남당포의 활기찬 모습을 잘 담고 있다. 그중 ‘아가씨 헤엄치기’라는 한시를 소개해 본다.

여인네 옹기종기 물 머리에 모여드니
오늘은 아가씨들 헤엄치기 시험날
그중에서 누구든지 헤엄잘 친 미녀한테는
남포 신랑감이 혼인 요청으로 비단옷감 보낸다오

남포-추자도, 끈끈한 연연을 맺다

남포마을은 추자도와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추자도가 지리적으로 해남이나 완도와 가깝지만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식량이 풍부한 곳은 강진이었다. 완도나 해남은 쌀 보리가 귀했다. 강진은 돈만 있으면 쌀과 보리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추자도는 섬이다 보니 봄에 식량이 자주 떨어졌다. 그럴 때면 배를 띄워 무작정 남포마을을 찾았다. 그럴때마다 남포사람들은 쌀을 구해주었다. 일종의 신용거래였다. 추자도 사람들은 쌀을 꿔주면 가을에 멸젓이나 해산물로 갚곤 했다.

추자도 사람들이 남포에 올때는 멸치젓, 전복, 미역, 부시리, 갈치, 삼치, 마른멸치 등을 싣고 와서 15~30일 정도 머물면서 물건을 팔거나 물물교환했다. 추자도로 들어갈때는 볏집과 식량을 가득싣고 배의 양쪽에는 대나무단을 실어 무게 중심이 잡히게 하였다. 지금도 추자도에 가면 남포에서 시집간 사람들이 많고, 남포마을에는 추자도에서 시집와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전라병영의 큰창고가 있었네

남포마을에는 조선시대 전라병영의 창고가 있었다. 전라병영의 관할구역이던 전라도와 제주도에서 바닷길을 통해 거둬들인 각종 세금을 남포의 창고에 저장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년(1794)의 기록에 “병영의 외창(外倉)이 강진(康津)의 남당포(南塘浦)에 있는데 그 창고의 3천여 석이 넘는 각종 곡식을 주민들에게 환곡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하고 있다.

이 창고는 각 지역에서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막대한 양의 군량미를 저장했다.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에 있던 전라병영성은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다. 남포에 병영의 외창이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조선시대때 군사적, 해양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남당포는 강진에서 제주도로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병영의 군량미를 비축하는 기지로서, 각종 상선이 대규모로 정박할 수 있는 항구로서의 핵심적인 기능을 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넋을 기리다, 남포천제

남포에는 오래전부터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 마을 서쪽 강변에 제단을 차리고 촛불을 켠다. 천제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이곳은 천황상제와 지황신를 모시는 높은 자리다. 지척에 있는 남쪽제단에는 금줄을 치고 100여개의 위패가 세워진다. 위패는 아주 작다.

싱싱한 대나무를 쪼개 그 끝에 창호지에 적은 신위란 푯말을 끼워넣는다. 이 위패는 바다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영령들을 위한 것이다. 후손들이 있는 영령들은 이곳에 끼지 못한다. 후손도 없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그저 바다에서 살다 바다에서 생명을 다한 넋을 위로하는 위패다.

남포마을 천제의 역사는 180여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남포마을에는 도강 18년 음력 정월에 적은 마을계책이 전해 온다. 도강 18년은 조선시대 말에 해당되는 1838년이다. 마을계책에는 천제를 지내는 방법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천제의 역사를 마을계책이 쓰여진 도강 18년으로 본다.

탐라(耽羅)-탐진(耽津)의 전설

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耽津)이었다. 강진은 신라 35대왕인 경덕왕(742~764)부터 탐진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년)에 강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탐진이란 이름이 사용된 세월이 자그마치 510여 년이었다. 제주의 옛 이름은 탐라였다.

그 이유는 제주사람들이 육지에 올 때 탐진을 통해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 등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성시였다. 그후 읍호를 탐라(耽羅)라 하니 그것은 형제 3인이 제주에서 나갈 때 탐진에 배를 대었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이 건너오던 탐진의 주 항구는 어디였을까. 이곳 남포마을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포마을은 고대부터 제주도로 들어갔던 길목이었다. 제주도는 이런 일을 기념하여 2006년 강진군에 탐돌이와 탐순이라 이름지은 말두필을 기증했다.

제주가는 바람을 기다리다.  ‘후풍처(候風處)’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리나 사신을 접대하고, 유배인을 관리하는 곳이 있었다. 이곳을 후풍처(候風處)라고 했다.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돛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서는 북풍이나 북동풍이 불어야 했기 때문에 후풍처에서 기다리며 적당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포마을은 대표적인 후풍처였다.

남포를 거쳐간 대표적인 유배인은 조선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사진)이었다. 우암은 왕세자 책봉문제로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향을 떠나는 길이었다. 선생은 1689년 2월 23일 저녁 무렵 남포마을에 도착해 제주도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큰 바람이 불어 백련사로 거쳐를 옮기고 후학을 가르쳤다.

우암은 3월 1일 백련사를 나서 남포에서 제주행 배를 탄다. 우암 선생은 제주도까지 갔다가 얼마 후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고 올라가다가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만다. 

강진의 독립만세운동 기폭제 남포마을

강진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매일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때 태극기를 은밀하게 매일시장까지 실어나른 사람들이 바로 남포마을의 어물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중에 제작한 태극기를 고기상자에 넣어 시장으로 옮긴 다음 신호와 함께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날 참석한 인원은 3천여명에 달했고 강진보통학교에 재학중인 이은표 등을 주축으로 보통학교 60여명의 학생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는데, 검사의 추궁에 대해 만세시위에 참여한 남포마을 출신 박영옥이 “내나라 내민족일인데 너희에게 자백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당당히 맞서 싸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씨가 남포마을 출신이었다. 주민들은 이들을 기리기위해 1992년 8월 15일 마을어귀에 기념비를 세웠다.
 
강둑이 터졌다, 그러나 언제나 자연재해를 극복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탐진강 하류는 천혜의 생태계 보고이자,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지만 홍수만 나면 큰 피해를 당하는 자연재해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74년 8월 중순에는 태풍 리타가 폭우를 쏟아 목리앞 탐진강 둑이 100m 정도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목리와 남포 들판이 물바다가 됐다.

이재민이 967명 발생해서 인근 초등학교로 긴급 수용됐다. 1981년에도 9월 2일 태풍 에그니스가 접근하면서 강진에 하룻동안 547.4 mm의 폭우가 쏟아져 군동면 신학리 신평마을 탐진강 둑이 터져 논경지와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됐다.

당시 에그니스 피해복구기간만 1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언제나 꿋꿋하게 복구에 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주희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1
강진~광주 고속도로 사업비 1천억 증액
2
대봉감 가격폭락 사상 최악, 농민들‘울상’
3
주문즉시 제작, 신선한 최고급 초밥‘인기’
4
차영수 대학역도연맹회장 지역발전대상
5
강진군산악연맹 겨울산행 한마음 친선 산행
6
계속된 현수막 불법설치에 과태료 부과
7
겨울건강 도우미 흑토마토 수확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로 35 강진버스여객터미널 2층 강진일보  |  대표전화 : 061)434-8788
사업자등록번호 : 415-81-43025  |  발행인 : 황민홍  |  정보관리 책임자 : 주희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주희춘
Copyright © 2011 강진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