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당파싸움을 가장 첨예하게 겪었던 조선시대 무신
모함이 많았던 시대... 관직 두루거쳐 
청주김씨, 작천 박산서 태어나  

강진읍 영파리에 있는 김억추 장군을 모신 사당 금강사 전경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무과(謁聖武科·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개최한 무과시험)에 합격한 김억추(1548~1618)는 훗날 정3품 벼슬인 병마절도사까지 오른다.

또 1615년에는 지금의 국방장관인 ‘증 병조판서’로 추서된다. ‘증(贈)’이란 관직떠난 사람에게 임금이 일종의 명예직책을 내리는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역사상 유례없는 참변을 몸소 겪은 무신이 병마절도사까지 오르기까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억추는 ‘철쇄(鐵鎖)’로 유명한 사람이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과 함게 진도 울돌목에 철쇄를 설치해 명랑해전의 승리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온다.

많은 사람들이 김억추를 명랑대전에서 잠깐 빛을 본 장수쯤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관직경력은 화려하다. 교지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관직이 20여개에 달한다.

사헌부감찰, 진산군수, 평안도방어사, 안주목사, 장흥부사, 담양부사,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여주목사, 진주목사, 밀량부사, 제주목사, 충청도병마절도사등이 그가 맡았던 관직들이다. 

김억추 장군의 영정
김억추란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35회 등장한다(조선왕조실록 검색. http://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에는 사헌부등에서 김억추가 전투에 적극참여하지 않고 목민관으로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상소가 자주 올라온다. 그런데 왕은 그때마다 상소문을 물리치는 경우가 많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선조 25년 6월 15일에는 ‘적들이 나타나면 허숙(許淑)·김억추(金億秋)는 물러나 움츠린다고 합니다. 퇴각하는 사람은 바로 참수(斬首)해야 합니다.’하는 상소가 올라오지만 선조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김억추는 161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광해군 4년 때의 일이다. 당시 광해군은 김억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주는 바다 가운데 있어 조정의 호령이 미치지 않는다. 군민을 보호하고 방비하는 등의 계책을 불가불 십분 강구하여 좋은 점을 따라 처리토록 하라.<광해군 4년 11월 15일>”

그런데 김억추가 제주도로 떠난 다음날 다음과 같은 장계가 올라온다.
‘제주 목사 김억추는 사람이 노둔하여 본디 명망이 없으니 큰 진을 단독으로 제재한다는 것은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집이 강진에 있어 제주의 배가 닿는 곳이기도 하니 폐단을 끼칠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직임을 파하라 명하소서. 제주는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의 영향을 받지 못하므로 공사간에 폐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장차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관직을 파하소서”

이에대해 광해군이 화를 내며 말한다.  ‘김억추의 일은 참으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어찌 그가 하직하기 전에 일찍 논의하지 않았던가. 이미 제주로 떠났으니 지금은 우선 그대로 보내어 그의 능력을 살핀 뒤 처치토록 하라. 윤허하지 않는다<광해군 4년 11월 16일>.”

광해군은 제주에서 목사직을 수행하는 김억추의 능력을 어떻게 보았을까. 김억추는 제주목사에 부임한 후 1년만에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된다. 다시 1년후에는 증병조판서의 직책을 받는다. 임금이 김억추를 크게 신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억추는 역사의 중심에서 임진왜란과 당파싸움이란 이중의 난을 가장 첨예하게 격었던 무관중의 한명으로 보인다. 청주김씨인 김억추는 1548년(명종 3년) 11월에 작천면 박산리에서 태어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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