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개경으로 청자 해상 운송 400년 역사
화물표 체계등 완벽한 해상 운송 시스템 발전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유통 기술 조기 정착
조선시대, 근대이후 강진의 상업발전 DNA 역할

지금으로부터 885년전인 1132(壬子)년 어느날 대구 사당리. 사당리 주민 한 사람이 개경으로 보낼 청자를 완성한 후 길이 40㎝, 폭 2.5㎝, 두께 0.8㎜의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우측 사진). 한손에는 먹물을 묻힌 붓을 들었다. 그리고 나무 조각 앞면에 조심스럽게 글씨를 써내려 갔다.

‘耽津縣在京隊正仁守戶付砂器壹裏印(탐진현재경대정인수호부사기일리인)’
“탐진현에서 개경에 있는 대정 인수의 집으로 보내는 도자기 한 꾸러미이다’. 사당리 주민은 목간에 발송지 이름+수취인 이름+보내는 물품 규모+자신의 수결을 적어 넣은 것이었다. 배에 청자가 실렸다. 선적이 끝나자 나무조각 뒷면에는 배에 청자를 다 싣고서 다른 사람의 글씨가 들어갔다.

‘次知載舡長화압(차지재강장화압)’ ‘배에 싣는 일을 맡은 책임자, 상기의 물건을 틀림없이 확인함.’  
목간의 앞면은 발송지에서 수신인에게 도자기를 발송한다는 운송 문서이고, 뒷면은 이를 배에 실으면서 선적인이 확인하는 점검 문서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최종 문서(목간)이 만들어져 마지막으로 배에 실리면서 청자운송준비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목간의 내용이 확실히 전하고 있는 내용은 고려시대 강진에서 개경으로 청자를 운송하는 과정이 보내는 사람과 이를 검수하는 사람이 철저히 분리되어 상품의 안정성을 꾀했다는 증거다. 이는 강진과 개경에 오늘날로 말하면 완벽한 운송체계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좌측사진은 태안선에서 발견된 목간의 모습이다. 목간은 오늘날 택배의 물표에 해당되는 운송장의 일종이다. 이렇듯 고려시대 강진에서는 개경과 오랜 청자운송이 이뤄지면서 다른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첨단 운송체계가 일찍이 들어섰다.
지난 2007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운반선(이하 태안선)에서는 12세기대 강진에서 만들어진 청자 2만3천여점이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고급청자 인양 못지 않게 세간을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청자와 함께 발견된 20점의 목간이었다. 885년전 사당리 주민이 붓으로 써내려간 목간은 그때 발견된 것이다.

해양문화재 발굴을 담당하는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1일 한국목간학회와 함께 그동안 발견된 목간을 조명하는 학술발표회를 목포에서 열었다. 청자축제를 앞두고 열린 학술발표대회에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강진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 태안선에서 발견된 목간들에 대한 연구 발표였다.

이번에 발표된 논문과 2007년 태안선 발굴이후 발표된 논문을 종합해 보면, 1132년 탐진에서 개경으로 보낸 청자운반선안에 든 목간에는 모두 4명의 필적과 2명의 서명이 담겨 있었다. 4명이 20점의 목간에 글씨를 적었고, 그 목간에 서명을 한 사람이 따로 두명이 있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청자가 번성하던 500여년 동안 강진에는 이렇듯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유통시스템이 형성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장보고가 828년 강진과 그 주변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등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하면서 부터 이어진 DNA 영향이 컸다고 할수 있다.

이는 고려가 멸망후 조선초기 전라병영이 강진으로 이설되면서 본격적으로 병영상인이 발전하는 뿌리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강진에서 상업이 발달해 온 큰 이유가 된 것이다.

손환일 경기대 교수는 “최종 검수자가 목간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물품의 이상 유무를 확실히 한 물품 확인서이다”며 “태안선에서 발견된 목간을 통해 당시 고려시대 청자 운송이 최첨단 유통시스템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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