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 해체과정에서 청동수병 발견
완벽한 형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통일신라시대 제작 추정‘명품’
청자축제 개막앞두고 큰 경사


월남사지 삼층석탑 해체과정중에 발견된 청동수병. 3층 탑신석 중앙에 1천년 세월동안 서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병의 모습이다. 좌측 상단의 구멍은 큰 물건을 넣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천년 기나긴 세월 월출산 아래에 우뚝 서 있던 3층석탑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청동 수병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부처님께 예불을 올릴때 사용하는 물병이다. 석탑안에 넣은 것으로 봐서 사리함으로 이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5일 오후 3시 50분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298호) 해체 현장. 높이 7.4m의 석탑을 위쪽에서부터 차례로 해체하기 위해 거대한 호이스트란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탑의 최 상단석을 내리고 탑 3층에 해당되는 돌을 제거하기 시작할 때였다. 탑신석이 드러나는 순간 안쪽에서 미세한 빛을 발하는 물건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 해체 회사 직원들이 주변 돌을 조심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놀랄만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3층 탑신석 중앙에 높이 20cm의 앙증스런 청동 수병(水甁)이 한치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다. 수병의 입구라 할 수 있는 뚜껑부분과 몸체의 상단부분에는 세월속에 쌓인 미세 먼지가 하얀 눈처럼 뒤덮여 있었고, 그 아래쪽은 역시 세월속에 빛이 바랜 청동이 비색에 가까운 푸르름을 발산하고 있었다. 청자축제를 앞두고 있는 강진에 큰 선물이 아닐수 없었다. 수병의 어깨쪽에는 인위적으로 뚫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한성욱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은 “청자 정병과 수병은 구분되는데 이번에 발견된 것은 수병이다. 구멍은 병의 입구로 넣지 못한 큰 것을 넣게 위해 일부러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탑신석 위에 세워져 있는 수병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구멍속을 살펴 보았다. 놀랍게도 볍씨들이 몇 개 보였다. 이는 불상을 조성할 때 치르는 일종의 복장(腹藏)의식으로 청동수병안에 오곡을 사리등과 함께 봉안해 석탑에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문화재청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밝혀질 전망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해체과정중에 발견된 청동수병. 3층 탑신석 중앙에 1천년 세월동안 서 있었다.
수병의 아래에는 병을 놓은 쟁반의 일종인 승반이 놓여 있었다. 승반은 뒤집어 놓인 듯 하고, 얇은 청동재질이 오랜 세월속에 부식돼 기울어지면서 승반의 테두리가 병을 애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병을 승반위에 올려 놓은 모양으로 완벽한 격식을 갖춘 형태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월남사지 3층석탑에서 발견된 청동수병은 후백제에서 통일신라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월남사의 설립연도를 추정하는데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설립됐다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수병의 형태로 보아 후삼국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설이 힘을 받게 됐다. 최근 월남사지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와당이 발견된 것도 이와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청동 수병은 중국과 일본에서 7~8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의 수병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발굴현장에서는 불교 전파과정을 감안할 때 일본에 있는 수병들은 이번에 월남사지 3층석탑에서 발견된 수병의 영향을 받고 제작된 것일 수 있다는 분석들이 나왔다.

한성욱 원장은 “앞으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번에 발견된 수병의 가치와 의미는 또 다시 해석될 수 있다”며 “수병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월남사지의 중요성이 한층 관심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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