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명 / 완도금일고등학교 교사

고려시대 ‘영화’ 조선시대 효령대군의 지원으로 중창

‘행호선사는 왜구에게 침탈당했던 옛일을 거울삼아 절을 둘러 긴 토성을 쌓아 놓았다. 그 토성은 지금은 야트막한 둔덕처럼 뭉그러졌지만 여전히 행호토성으로 불린다.’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보면 강진만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한 바위산인 만덕산이 있고 그 산 남쪽자락에 잔잔한 바다를 끌어안은 듯 혹은 내려놓은 듯 백련사가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 구산선문 중 하나인 충남 보령의 성주사문을 개창했던 무염(無染, 801~888)이 창건하고 ‘만덕산백련사(萬德山白蓮社)’라 칭했는데, 조선후기에는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현재는 다시 백련사(白蓮寺)라 칭하게 되었다.

고려중기 불교결사운동의 본거지로 명성을 얻은 후 고려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후기에는 8대사가 주석한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명찰이다.

고려 희종 7년(1211) 월출산 약사난고에 있던 원묘국사 요세(了世)가 강진에 사는 최표(崔彪)와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의 간청과 후원으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7년 동안의 대역사 끝에 가람 80여 칸을 짓고 수도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요세는 83세로 입적한 후 국사로 책봉되었고 시호를 원묘, 탑명을 중진이라 했다.

요세가 입적한 이후 백련사는 천인, 원환, 천책 등으로 법맥을 이어오면서 120년 동안 여덟 국사(國師)를 배출할 만큼 번성했다. 그러나 고려왕조의 말기 현상과 함께 한반도 서남부 해안지역에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하면서 백련사도 거의 폐사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같은 시기 대구면에서 고려청자를 굽던 도공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가마도 폐쇄됨으로써 고려시대 가장 찬란한 지방 문화를 꽃피웠던 강진의 영화도 고려왕조의 몰락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던 셈이었다.

조선 초기에 들어서는 태종 때 조계종 자복사 24사에 속하는 등 겨우 명맥은 유지했으나사세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세종 12년(1430)에 이르러 천태종의 종장인 행호선사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하기 시작, 6년에 걸친 불사 끝에 비로소 옛 모습을 되찾았다.

행호선사는 왜구에게 침탈당했던 옛일을 거울삼아 절을 둘러 긴 토성을 쌓아 놓았다. 그 토성은 지금은 야트막한 둔덕처럼 뭉그러졌지만 여전히 행호토성으로 불린다.

그 후에도 효종 1년(1650)부터 현오스님이 10여 년에 걸쳐 몇몇 건물을 중수하였고, 숙종 7년(1681) 탄기 스님이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는 등 몇 차례 중수되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큰 불이 나서 대웅전, 만경루 등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고 불상만 겨우 건져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백련사는 그 후에 중창된 모습이다.

조선 시대에도 백련사에서는 8명의 대사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바로 대둔사 12대 강사로 다산 정약용 선생과 교류했던 혜장선사 아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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