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정의롭게 살다가신 분

김병철 광주전남자치단체공무직노동조합 강진군지부장이 강진군농민회 부회장으로 농민활동에 매진했던 고 강창수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에서 청년운동하며 처음 만나
1980년대부터 농민운동 뛰어들어
사사로운 이익보다 농민들 우선시
세상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 배워

나는 지난해 1월부터 광주전남자치단체공무직노동조합 강진군지부장으로써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권익보호와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오고 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현재 가입대상자 168명중 84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으며 올해말까지 1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러가지 일을 하다보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바쁜 생활속에서도 신전 송천마을 인근을 지날때면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강창수 강진군농민회 부회장님이다. 개인적으로는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내가 형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도암교회를 다니면서였다. 20대 초반에 도암에서 농사를 지으며 주말이면 교회를 다녔다. 농민운동에 빠져있을 때였기때문에 교회에서도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당시에 형님께서는 신전 송천교회에 다니고 계셨고 역시 교회 청년운동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처음 형님을 만나게 됐는데 푸근한 인상을 갖고 계셨고 따뜻한 마음과 강한 추진력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에 형님은 신전 간척지 땅을 개간하셨다. 약 2만평정도 묵혀놨던 땅을 형님 혼자서 개간하셨는데 나와 친구들이 함께 형님을 찾아가 일을 돕곤했다.

그때 형님은 경운기 바퀴가 뻘에 빠지지 않게 장치를 직접 만들어 설치하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드럼통을 잘라서 경운기 바퀴 아래에 달아 논에 빠지지 않고 로타리를 치는 작업을 하고 계셨다. 이 모습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 형님은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 고물장수를 겸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이후 형님은 당시 명문고등학교였던 광주상고를 졸업했던 점을 활용해 신협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아끼던 동생이 안타깝게 사고로 세상을 떠난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신전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와 형님은 80년대부터 기독교농민회 활동과 전농 초창기때 활발히 활동을 했다.
 
또 의료보험통합운동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 했다. 형님은 강한 추진력과 함께 자신이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해낼 정도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형님의 이러한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었다. 당시에 강진군새마을회장이면서 대한곡물협회장으로 활동하며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기환 선생님과 있었던 일이다. 신협에서 일하고 있었던 형님은 예금유치에 발로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로 자산이 많았던 박기환 선생의 예금을 신협으로 유치하기 위해 형님은 박 선생님이 자주가는 목욕탕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때를 밀어드리고 목욕을 도와주곤 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한 박 선생님이 예금을 신협으로 유치해주었던 것이다.

고 강창수 강진군농민회 부회장
또 형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형님이 농사를 짓다가 신전의 한 낡은 도정공장을 인수했다.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운영을 시작했다. 바로 사초정미소였다. 농민회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를 고민하다 도정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흑미를 구입하게 됐는데 가격이 폭락했을 때 대신 판매라도 해주자는 심정에서 흑미를 사들였다. 몇일 후 갑자기 흑미 값이 폭등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형님은 이윤을 많이 남기지 않고 판매를 하기도 했다. 또 농민회원들이 도정공장에 쌀을 맡기면 외상으로 거래를 해주기도 하셨다. 이러한 점때문에 항상 많은 돈은 벌지 못하셨다.

자신이 원했다면 충분히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길을 택하지 않고 농민들을 위해 사는 힘든 삶을 선택하셨던 형님을 바라보며 나는 항상 존경심이 들었고 아직까지도 나의 우상이자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순간은 바로 형님이 폐암말기 진단을 받았던 때였다. 정미소를 운영하시던 형님이 갑자기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폐암 선고를 받았다. 나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도 운영하던 수양관광농원이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형님의 폐암선고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암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소문난 병원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내가 직접 형님을 모시고 찾아갈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형님을 위해 보증도 서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가족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1년여간 투병생활끝에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임종까지 지켜보고 장례까지 무사히 치러드렸다.

형님의 모습을 보며 세상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살아갈 희망을 찾기도 했다. 또 물건 정리하는 법, 글쓰는 법 등 여러가지 방법들도 배웠다. 아직도 문득 신전을 지날때면 형님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형님 보고싶습니다.    <정리=오기안 기자>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