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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장 ‘별 것 아니다’ 뺏어가국립박물관, 어부에게 보상금 주고 회수2002년에도 낚시꾼 신고로 발굴작업 1960년대 후반부터 대구 사당리 일대에 대한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주민들의 청자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무덤에서 나온 재수없는 물건 정도로 취급되던 청자나 청자파편들이 천하의 귀물로 대접받으면서 주민들의 시각도 크게 바뀐 것이다.이에 덩달아 강진에는 대구 미산앞바다에 고려청자가 수장돼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배로 청자를 운반하던 중 사고나 파선등으로 물속에 잠긴 청자가 여럿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갯뻘이 많지 않은 뱃길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였다. 청자를 주워 올린 주민들도 몇몇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를 건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8.2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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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거북 신드롬... 잡히면 상부에 보고1957년 여수서는 거북잡아서 놓쳐버려 망신살강원도에서는 막걸리 한말 먹여 살려 보내기도1949년 강진에서 잡힌 거북이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속에 전국적인 히트를 치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북신드롬이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당시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몇가지 사례를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그중에 단연 압권은 1957년 8월초 여수근해에서 잡힌 세계최대 거북사건이였다. 이승만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강진거북이 죽은지 1년이 된 시점이였다. 그해 8월 25일, 내무부치안국에 전남여수에서 길이가 삼십미나 되는 세계최대의 큰 거북이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강진거북이 죽은 후 이승만대통령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8.0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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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있어서 훼예포폄(毁譽褒貶) 지나치면 결국 문제”몸에 혹나고 식음전폐... 1956년 8월 1일 끝내 숨져이대통령 필사적 노력불구 백약이 무효박제만들어 경무대에서 보관 ‘강한 집착’2012년 7월 7일 부산 국립수산과학원서 일반공개1949년 강진만에서 잡혀 부산 중앙수산시험장으로 옮겨간 후 ‘강진거북’은 태평성대를 누린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던 1956년 7월초 어느날, 중앙수산시험장의 수의사가 거북의 몸둥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목과 다리에 혹이 생기기 시작 한 것. 거북은 조금씩 음식을 멀리하더니 결국 하루 12㎏까지 먹어 치우던 조개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중앙수산시험장이 난리가 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7.3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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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천운이다.... 고위직 공무원들 앞다퉈 거북 ‘알현’하루 사료값만 쌀한가마 값 ‘극진대우’‘이대통령의 운명과 관련있다’ 6.25후 더 유명세 1956년, 슬픈 모습으로 돌아오는데...강진거북은 1949년 그해 도암에서 부산으로 옮겨졌다. 당시 거북이 어떤 방법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관심이 지대한 거북이 부산에 도착하기 까지 어떤 격식과 분위기가 동원됐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거북의 안식처는 부산영도에 있는 중앙수산시험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수산시험장이었다. 거북을 키우는 것도 당시 처음있는 일이었다. 강진거북은 이곳에서 미리 마련한 길이 6m, 폭 3m의 ‘물통’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거북을 보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7.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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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평상만 합디다”... 어부의 한마디가 그대로 경무대까지98㎝짜리 거북이 2m로 둔갑주민들 “복받는다” 거북등에 올라타고 막걸리까지 먹여이대통령, 창경원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결국 부산행 바다거북의 크기는 최종적으로 98㎝로 확인된다. 그럼 1m 정도의 바다거북이 평상만한 크기로 둔갑해 경무대까지 보고되고, 경무대가 다시 미국 대사관에 특명을 보내 세계에서 가장 큰 거북으로 공인까지 받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 사연이 재미있다. 1949년 가을 강진군 도암에서 큰 거북이 잡혔다는 소식이 처음 올라가자 경무대에서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라는 지시가 강진경찰서에 내려왔다. 도암지서주임이 거북이가 잡혀 있는 도암 용산마을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때는 만조때라 죽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7.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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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강진만에서 잡힌 거북 한 마리이승만 대통령 ‘취임 1주년 축하하는 길조다’ 극진한 대우경무대, 미국대사관 통해 거북크기 비교 지시미국어류전문가 ‘평상크기라면 세계최대’ 공인실제 크기는 130㎝정도... 그것도 큰 편1949년 8월초 어느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전남 강진에서 평상만한 거북이가 잡혔다는 급보가 올라온다. 경무대는 술렁거렸다. 며칠전에는 창경원에 파랑새가 나타나 이승만 대통령을 한껏 고무시킨 적이 있는 터였다. 자유당 당직자들은 파랑새가 나타난것에 대해 ‘각하, 하늘이 각하의 취임 1주년 축하사절을 보내고 있습니다’고 아첨을 했다. 이승만대통령은 파랑새에 이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그것도 평상만한게 잡혔다는 소식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예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7.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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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청자요지는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진 후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이 됐다. 사당리와 용운리등 가마가 집중돼 있는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60년대에 청자 수집상들이 수시로 마을로 찾아들었고, 이런저런 그릇이나 파편들을 엄청나게 주워갔다. 주민들은 청자의 중요성을 거의 모를 때이다. 무덤을 탐색하던 도굴꾼들도 많았다.동아일보 1970년 11월 6일자에는 서울 인사동에 전국의 호리꾼(도굴꾼)들이 4~5천명에 달하고 있다며 이들의 주 무대는 요지가 있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고부등은 물론 경주와 부여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한 호리꾼과의 인터뷰 내용이 재미있다. 이 사람은 “쇠꼬창이 끝에 오는 감촉으로 무덤속 골동품을 찾아내는 호리꾼의 희열은 알피니스티의 정상정복에 비길 만
그때 그사건
강진일보
2012.07.0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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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길 상업 활발 강진사람들 해난사고도 많았다1954년 12월 부산앞바다 마량 선적 화물선 침몰 강진사람 5명 숨져뱃길을 이용해 상업을 많이 했던 강진사람들은 해상에서 사고를 많이 당했다. 돛단배에 옹기를 싣고 제주로 팔러다니던 사람들이 태풍을 만나 배가 좌초된 경우도 있었다. 강진의 뱃길은 1930년대 40년대가 가장 활발하게 뻗어나갈 때였지만 1950년 6. 25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강진에서 인천과 부산, 제주를 잇는 교역항로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1954년 12월 부산에서 일어난 선박 해상충돌 사건은 가히 강진의 초대형 해난사고라 할만한 사건이었다. 1954년 12월 8일 오후 6시경 마량면 마량리 고명근씨의 19톤급 백야호가 부산항 송도 방파제앞 200m 해상에서 부산
그때 그사건
강진일보
2012.06.2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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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강진의 주요 행사는 모두 강진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됐다. 금릉문화제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 결승전, 학생들 종합체육대회의 단골 장소가 동초등학교 운동장이였다. 동초등학교 운동장은 유일하게 대규모 스텐드가 갖춰진 곳이였다.1975년 5월 24일. 그날은 토요일이였다. 이곳에서는 관내 학생들이 모두 모여 강진군소년체전이란 큰 행사를 열고 있었다. 봄날 상큼한 날씨와 함께 오전 10시 개막식이 시작됐다. 학생들이 각 학교별로 차례로 입장을 했다. 식전행사가 끝나고 마지막 성화대에 불을 점화하는 순서가 왔다. 시간은 10시 30분이 됐다. 한 학생이 큰 박수를 받으며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성화는 성공적으로 타올랐다. 그런데 10분정도가 지날 무렵, 성화가 꽝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6.19 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