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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동아의학연구회장이 발견철분유황 다량함유…‘수많은 병 고쳐’강진읍 임천리 뒤쪽 아양저수지 터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었다. 이와 관련 구체적인 기록이 있어 소개한다.동아일보 1936년 5월 29일자에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임천리 뒤에서 약물이 발견돼 원근을 불고하고 방문객들이 매일 운집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이 약수터는 11년전, 그러니까 1925년 서울의 동아의학연구회 회장인 김용승씨가 발견하고 계속 복용한 결과 30여년 신음중이던 중병을 치료했다고 소개했다. 김용승씨는 약수터 인근에 거액을 들여 편의시설을 짓기도 했다.서울의 의학자가 효염을 증명하고 나서면서 이 약수터는 일약 전국적인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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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 영포출신 교민 김추윤씨 본사에 편지1973년 '갈갈이 사건' 취재 온 최풍작가 안내 미국의 콜로라도 주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군동 영포가 고향인 올해 60대 후반의 김추윤이란 독자였다. 강진일보 인터넷 홈페이지(Nsori.com)에서 ‘강진갈갈이 사건’ 연재를 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미국에 산지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김추윤 독자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기사를 계속 보다가 그 과정을 조금 알고 있어서 참고하라’고 편지를 적었다고 썼다.그러니까, 1973년 12월 중순쯤 되던 날이였다.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해서 해가 많이 짧아진 때였다. 그때 김추윤씨는 군동면 예비군중대본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였다. 아마도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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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의보직원 일본통해 월북… 북한 방송듣고 파악1999년 평양방송 출연 “농촌 경리부분 일꾼으로 일하며 잘 있다”1991년 1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청취된 북한관영중앙통신에 짤막한 보도하나가 나왔다. ‘28일 남한의 전남 강진군 출신 의료보험회사 직원 강00(29)씨가 월북했다. 강씨가 남한사회는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로서 빈부의 격차가 전보다 더 심해지고 있는데 환멸을 느껴 수년 동안 북한으로의 탈출 방법을 모색해 왔다고 말했다’당시에는 주로 도쿄에서 청취된 북한 중앙통신을 통해 북한내 소식이 외부에 알려질 때다. 국내 언론은 ‘일본 동경에서 청취된 북한관영중앙통신에 따르면’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1월 29일 중앙통신의 보도를 인용해 강씨의 월북사실을 짧게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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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 이야기… 이제 영원한 역사속에 묻어야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자 그 반향이 엄청났다. 전국이 갈갈이사건 열풍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건이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청취율이 60% 이상이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 10사람중 6명 이상이 강진갈갈이 사건을 열광적으로 청취한 것이다. 그 정도면 요즘 TV 오락프로그램이나 인기 연속극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그렇게 심어진게 ‘강진= 갈갈이 사건’이였다. 강진갈갈이 사건이 방송되기전 사람들은 강진이란 지명 자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에야 각종 매체가 발달돼 전국 군단위 지명과 위치를 어느정도 파악하지만 당시는 경상도의 군위군이나 충청도의 괴산군 같은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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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갈갈이 사건’강진주민들 아무런 항의 안해“사회공익 이해하지만 지나친 흥미위주 씻을 수 없는 불명예”1974년 4월 첫 방송을 탔던 법창야화의 기획의미는 밝은 사회건설과 인간성 회복이였다. 법창야화는 첫 방송을 시작으로 6년반 동안 47화를 내보내며 2천15회라는 기록적인 방송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법창야화는 47화가 방송되는 동안 ‘밝은사회 건설과 인간성 회복’이라는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76년 방영된 19화 ‘천사와 사형수’에서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수감중인 한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형시키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기도 한다. 노모가 아들을 위해 교도소 바로 옆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각 종교계와 정계등에서 그 사형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0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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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사형, 2심도 사형 선고...대구형무소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일제강점기 살인사건, 극작가 최풍씨가 30년만에‘갈갈이 사건’으로 되살려고재웅이 완전범죄를 위해 꾸몄던 사건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그는 일단 소갈찌를 죽이면서 얼굴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누구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DNA 분석과 같은 수사기법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신원파악을 할 수 없었다. 고재웅이 그 다음으로 고안해 낸 것은 소갈찌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였다. 밤중에 소갈찌 목소리를 내며 은순네를 찾아갔다. 그다음 단계는 소갈찌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것이였다. 사람을 죽인 소갈찌가 살아서 도피행각을 하며 장흥에서 은순네에게 편지를 한 것처럼 꾸몄고, 그 후에는 소갈찌가 밀항을 해서 일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1.0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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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멀리 떠나야 할 것 같다”필적감정 수사기법 없어 경찰수사 오리무중소갈찌가 갈갈이 사건을 일으키고 도망다니는 것 처럼 꾸미기 위해 밤중에 은순네 집에 찾아가 소갈찌 목소리를 냈던 고재웅은 다음에는 편지 사기극을 벌인다. 이 부분은 현지 주민들의 증언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밤중에 은순네 집에 찾아가 소갈찌 목소리를 낸 후 며칠 후 은순네 집에 장흥우체국 소인이 찍힌 다음과 같은 편지가 배달된다.‘... 각설하고, 지난번엔 심야에 소란을 피워 미안하게 되었고만...... 나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집에 못 들를 것잉께 고렇거럼 알고 모든 집안 일을 잘 부탁한다. 특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임신한 아기 잘 낳아서 잘 키우기 바라며 나는 워쩌면 멀리 떠날 것이니 몸성히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2.1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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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분석 없었던 수사기법, 시신 신원 파악 어려움고재웅, 밤중에 소갈찌 목소리 흉내내며 은순네 찾아가기도1939년 4월, 산속에 방치된 시신을 발견한 경찰의 수사는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고재웅이 소갈찌의 시신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일부러 훼손한데다 수개월 동안 산짐승에게 방치된 시신은 엉망이였다. 1913년 성전에서 호랑이가 잡혔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있고, 1950년대까지 강진에서 호랑이를 봤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당시에는 과학수사가 없을 때다. 요즘에는 부패가 심한 시신을 DNA 분석을 통해 몇시간안에 신원을 확인하지만 당시 얼굴이 훼손되고 손톱이 뽑힌 시신은 도대체 누구인지 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한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사건’이 전개되는데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2.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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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당시 시신 상태가 소문 확대재생산 가능성고재웅 조직적 사건은폐 ‘시청자 호기심 자극’고재웅은 급작스럽게 소갈찌를 들이 받았으나 그가 비명을 지르면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자 얼떨결에 뛰어 내려갔다. 소갈찌는 의식을 잃은채 ‘으, 아이고메....’하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잉,요 잡놈’ 고재웅은 죽어가는 소갈찌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소갈찌는 ‘야, 나 좀, 나 좀, 살려 줘 잉, 아이고메...’ 연방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살려줘?. 흥!’ ‘아이고메.... 아이고매...’‘너 같은 잡놈은 죽어야 혀!’ ‘으, 으......’드디어 소갈찌는 숨이 끊어졌다. ‘잉?’예상외로 소갈찌는 숨이 빨리 끊어졌다. 고재웅은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오던 길로 뛰기 시작했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2.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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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방송작가 사건 팩트 접근 못해 1939년 사건을 1946년으로 소개퇴직경찰의 영웅담 수준 픽션가득범인인 고재웅이 노름쟁이 소갈찌를 죽이는 과정은 드라마 법창야화에 의외로 단순히 묘사된다. 책으로 나온 법창야화 분량이 446페이지인데 두 사람이 군동에서 산길을 따라 병영으로 넘어가며 살인사건이 벌어진 과정은 고작 두페이지 분량도 안된다. 나머지 440페이지 정도의 분량, 그러니까 ‘갈갈이 사건’이란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으면서도 드라마의 99%가 범인을 잡기까지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 신변잡기식의 내용이 대부분이다.소갈찌가 노름돈을 보태라고 윽박지르자 병영사람에게 돈 받을 게 없으면서도 병영에 함께 가자고 거짓말을 했던 고재웅은 소갈찌와 함께 병영으로 가기 이틀전 미리 그 길을 걸어본다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1.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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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 판돈 가져와라” 소갈찌 괴롭힘에 살인결심 일제강점기 만연했던 노름문화가 사건의 본질 법창야화는 치정관계 부각 국민들 호기심 자극당시 주민들의 증언과 강진갈갈이사건의 대본을 종합해 보면 ‘강진갈갈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기는 1930년대이고 사건의 무대는 군동면 A마을과 B마을 일대다. A마을에 도박을 좋아하는 고재웅(당시 나이 26세.법창야화에 나오는 가명을 여기서 그대로 사용한다)이란 사람과 B마을에 소갈찌(당시 나이 43세. 역시 법창야화의 가명을 그대로 사용함)란 사람이 살았다. 소갈찌 역시 소문난 노름꾼에 깡패였다. 고재웅은 머리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당시 강진보통학교(현재의 강진중앙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군동의 한 주민은 “재웅이가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1.2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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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단순 살인사건 드라마가 사건 확대 재생산전달매체 부족한 시설 소문이 더 큰 소문 만들어지역주민들도 '살벌한 소문' 산파역강진갈갈이 사건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범인이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죽였고 그 때문에 ‘갈갈이 사건’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럼 당시 사건은 사람을 정말 갈기갈기 찢어 죽였던 것일까.지난호에서 기술했듯이 ‘강진갈갈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1940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 기록이 있고, 법창야화 1화가 방송된 대본을 편집해 펴낸 ‘문화방송 연속실화극 강진갈갈이 사건’이란 책자가 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건이 발생했던 마을사람들의 증언이 있고, 그 다음으로 사건현장에서 한참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소문으로 들은 구전이 있다.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1.1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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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책)내용 야화수준… 허구가득소설로 발행돼 베스트셀러되기도그게 전국청취자들에게‘진실’로 전달1940년 5월 23일 2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강진군 00면 00리 000(26)은 같은 마을 사는 0모(43)의 첩 술장수 000(31)과 수년전부터 간통관계를 맺어 왔는데 그동안 여러차례 채에게 발각되어 돈도 빼앗기고 위세도 당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10월 30일 오후 6시경 오는 채를 죽이기 위해 뒷산으로 도박을 하러 가자고 꾀어내어 도박을 하다가 돌연 칼로 찔러 목을 베어 죽인 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얼굴 가죽을 벗기는 갖은 끔찍한 짓을 한 뒤 사교인 천수교도들이 죽인 것 처럼 증거품을 남겨놓고 영산포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가 1940년 2월 28일 검거된 것이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1.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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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갈갈이 사건이 법창야화 제1화로 방송된지 올해로 38년이 됐다. 40대 후반 이상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직도 ‘강진= 갈갈이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건의 발생시기나 사건내용, 방송전달과정등에서 심각한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이 사건은 사건이 사건이 아니라 법창야화 1호가 된 것 자체가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강진의 명예회복차원에서 강진갈갈이 사건의 진실을 차례로 연재한다./편집자 주=================================================================================1939년 토막살인사건이 1970년대 갈갈이사건으로 둔갑향우들 “강진, 남도답사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10.3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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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 20인분, 청주 한말, 닭 두 마리, 오리 세 마리 달라‘체납처분기동대’ 마을 돌며 행패군의원 폭행하며 세금 받아가기도6.25 전쟁을 치른 후 주민들은 극도의 피폐함속에서 살아야 했다.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몇 년째 흉작이 들어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였다. 그러나 세무당국의 행패는 극에 달했다.동아일보 1954년 12월 27일자에는 강진세무서 직원들이 칠량면의 한 마을에서 행패에 가까운 ‘탈선행위’를 했다는 고발기사를 보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에 강진세무서는 ‘체납처분기동대’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세금을 수거한다며 각 마을을 돌며
그때 그사건
주희춘
2012.10.0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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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직전 강타... 피해 주민들 고통의 추석맞아태풍과 폭우는 추석을 시기하는 걸까. 이달들어 대규모 태풍이 세 번이나 강진을 후려치고 지나가면서 주민들이 전례없이 어려운 추석을 맞고 있다. 옛 신문들을 보면 추석전에 강진을 강타한 태풍들이 적지 않아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1981년 추석은 약력으로 9월 12일이 추석이었다. 그런데 9월초 태풍 에그니스가 강진을 강타했다. 강진에는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696㎜이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군동면 신학리 신평마을은 탐진강 둑이 터져 전답 40정보와 가옥 71동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남포와 목리마을도 마을이 물에 잠겼다. 강진~장흥간 국도도 탐진강 제방과 함께 상당부분이 유실돼 교통이 두절됐다. 당시 에그니스 피해복구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9.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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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사람 김홍여의 고통이 조선인민 1천700만의고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일제강점기 조선농민 수탈 상징‘동양척식주식회사 폐지하라’ 목소리그러나 해방되던 해에 동척폐지군동주민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소속 일본인 지주에게 폭행 당한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탄압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돼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1922년 4월 23일 이 사건을 사회면에 보도한 동아일보는 다음날 1면 톱기사로 ‘동양척식회사 폐지를 재론하라’고 보도한다. 군동주민이 폭행당한 것을 동척폐해의 상징으로 다룬 것이다. 그만큼 전국적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조선인 농민수탈이 심각했다.동아일보는 강진군 군동면 김홍여씨가 동척 소속 주민에게 폭행당한 것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낙엽이 떨어지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9.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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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군동농민 논 빼앗고 몽둥이로 폭행‘동척이민’ 일본인의 대표적 만행으로 규탄 일제강점기때 강진에 일본인 정착마을 두 곳일제, 주민들 땅 빼앗아 일본인에 경작권 줘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1909년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 만든 기관이다. 토지와 금융을 장악해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수탈해 간 첨병이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그런데 1922년 4월 강진의 한 주민이 일본인 농업 이민자로부터 폭행당한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동양척식회사의 폐지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동아일보는 강진 주민이 폭행당한 일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9.1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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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호랑이 포획 공식기록으로는 마지막해방후에도 몇 마리 생존한 듯강진에서는 언제까지 호랑이가 살았을까. 황성신문 1913년 2월 14일자에는 강진에서 호랑이가 잡혔다는 기사가 전국기사에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기사에 따르면 강진군 성전면에 거주하는 이욕림이란 사람이 2월 8일 집 근처 밭가운데에 함정을 파고 돼지 한 마리를 넣어 암호랑이 한 마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이를 팔기 위해 목포로 가지고 갔으나 목포경찰서에서 ‘조사할 필요가 있어서’ 강진경찰서로 이씨의 신원을 조사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이욕림이란 주민은 호랑이를 불법으로 포획한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지금 기준의 생각이니, 당시에는 이런일이 많아서 아무런 죄가 디지 않았는지 모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9.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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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아버지 처녀보전증거신청 냈으나 갑자기 변사전남도의회 진상조사, 전국적 관심 1960년대 초 강진에서는 희대의 소송이 벌어져 전국의 관심을 받았다. 강진읍의 한 마을에서 ‘처녀보전증거신청’이라는 소송이 벌어진 것이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인데다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이 도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단연 전국 신문의 주요뉴스로 취급됐다. 사연은 이랬다. A모씨와 아들 B군(21), C모씨와 셋째딸 D모(20)양은 강진읍의 한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이었다.그런데 어느날 B군이 D양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고 다니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B군의 주장에 대해 한마을에 살고 있었던 D양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양가의 부모들이 이 일에 가만 있을리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2.08.28 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