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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제주에서 강진오던 장한철 청산도에 표류해 한 여인과 로맨스우리나라 해양문학의 백미... 메밀꽃 필무렵의 물방앗간 사랑과 비교되기도 1770년 12월 25일 제주의 장한철이란 사람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을 향해 출항한다. 제주사람들은 겨울철 항해를 피했으나 아마도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은 무슨 사연이 깊었던 듯 싶다. 장한철처럼 과거일정 때문에 배를 탄 사람도, 강진에서 제주로 장사를 갔던 사람도 끼여 있었다.일기예보가 없던 시절, 겨울 바다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오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지금의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하기 시작한다. 배는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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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2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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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이 상상한 곳은 신라의 수도 금성이 아니라 강진의 옛 이름인 ‘금릉’일수도함평에서 발견된 ‘서역인의 얼굴이 새겨진 토기’는 이미 6세기에 아랍인들과 호남지역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교류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물건을 사고 파는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양을 항해하다가 태풍에 밀려 표류하다가 이곳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당시에 남중국 지역에는 서역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때이다. 기원전 바빌론과 유프라테스강 하구에서 시작돼 동진을 계속해 오던 남해로(南海路)는 인도와 미얀마, 말라카해협을 거쳐 7세기 들어 남중국 지역까지 도착해 서역인들이 많이 이동해 왔다. 7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통일신라시대를 열 때이다. 아랍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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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1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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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는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연결서역 문명이 강진에도 왔다우리나라에 아라비아인들이 왔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려사에 나온다. 현종 15년(1024) 9월에 대식국(아라비아)인 100인이 내방해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고려에는 벽란도란 항구를 통해 국제무역을 하고 있었던 때다. 이들이 중국 산동성과 같은 북쪽지방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벽란도로 왔을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유력한 방법은 지난호에 소개했듯이 송나라 서긍이 그랬듯이 중국 명주항에서 출발해 흑산도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 연안을 타고 북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는 강진에서 개경간 뱃길도 활발했을 때다. 최고급 청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돼 개경으로 실어나를 때가 이때부터다.여기서 또 한가지 관심을 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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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0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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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해양실크로드 타고 중국 명주까지 왔던 아랍인들계절풍 항로 따라 전남 서남부지역 자주 왕래했을 것강진은 그중에서 의미심장한 곳중의 하나서역인들의 흔적은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유물에서 다양하게 발견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서역인 모양을 한 얼굴 유물은 전라도나 충청도에서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대구 저두리에 6세기에 아랍인들이 내왕했다는 말도 그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학자들은 서역인들이 해양실크로드의 끝지점이었던 중국의 절강성 양주(지금의 상해일대)에서 신라의 울산항을 왕래하며 교역을 하지 않았느냐는 추정을 해왔다. 울산항은 통일신라시대 국제무역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하지만 그런 논리는 여러가지 허점이 많았다. 중국 절강성 쪽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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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5.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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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유물... 서남해안 지역도 아랍인들과 교역증거몇 년전 양광식 강진문화재연구소 소장이 한 지역신문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남부에 위치한 아랍에미레이트 사람들이 6세기에 대구면의 하저쯤에 왔다 갔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사람들은 국제무역을 하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강진의 해양역사적 가치는 물론 청자의 유입과정등에 대해서도 또 다른 시각을 검토할 수 있는 사안이였다. 양소장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대가인 정수일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전해들을 이야기라고 했다. 2008년 정수일 교수가 다산강좌를 위해 강진에 온 적이 있다. 고령의 정교수에게 그 이야기의 출처를 물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였다. 갑자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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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4.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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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최대 관광상품으로 성장일부학자들 “도선의 역사와 중복” 요즘 영암에서는 '2012 영암왕인문화축제'가 한창이다. 강진의 청자축제가 그렇듯이 영암에서 왕인문화축제는 가장 큰 행사이다. 강진에 고려청자가 있다면 영암에는 왕인박사가 있다고 묘사될 정도다.왕인박사는 일본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국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일본에는 고대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백제 17대 아신왕 14년인 서기 405년 백제인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 70년대 들어 사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왕인의 고향이 영암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가 왕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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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4.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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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해남, 영암등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무덤 ‘전방후원분’해양교류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해야'일본식 무덤이다’ 지자체․ 학계도 소극적 태도 강진과 해남, 영암등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들은 어떤 형태로든 일본문화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역사가들로부터 애써 외면당해 왔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양식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에서 왜식 토기가 출토돼 이 무덤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학계의 우려가 컸다. 80년대 초반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10기 이상이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영산강 일대를 지배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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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4.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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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동리 고분에서 1천500년전 일본인 유골 발굴함평 신덕고분 미스테리도 궁금... 그 때 영산강유역에는 무슨일이 있었을까369년 침미다례가 백제 근초고왕으로부터 패한 후 마한은 완전히 멸망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는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나주시의 반남면과 영암의 시종면등에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묘제문화가 발전한 것으로 봐서 백제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여전히 존재 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초대형 옹관묘가 그것이다. 백제의 분묘양식은 이 지역에서부터 6세기 후반부터 발견되고 있다. 다시말해 369년 침미다례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는 약 200여년 동안 마한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백제가 마한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주며 느슨하게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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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3.2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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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9년 어느날, 근초고왕의 백제군이 군동의 고해진 들녘에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백제군의 창끝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백제에 투항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마한의 마지막 부족국가 침미다례(枕彌多禮)가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파죽지세였다. 마침 신라쪽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 전라도쪽으로 넘어온 터라 병사들의 사기도 충천했다. 침미다례는 백제군의 기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역사는 마한의 멸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마한의 최후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에 그런 기록이 있으며 우리 역사학계가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한의 멸망과 전방후원분의 관계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강진
역사향기
주희춘 기자
2012.03.2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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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장흥군 대덕읍 연동마을에 백제의 태자와 혼약을 하고 왕비로 책봉된 후 태자가 죽자 평생 수절한 ‘허연지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한 김에 한 사람 더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다. 공예태후(1109~ 1183)다. 공예태후가 태어는 곳은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이다. 천관산을 중심으로 대덕읍 연동마을은 천관산의 남쪽이고 당동마을은 산의 북쪽이다. 천관산을 두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왕비의 역사가 있는 것은 상당히 특이하다. 해질녁에 관산읍의 북쪽지역에서 당동마을쪽을 바라보면 신비함과 웅장함이 유별나다. 천관산을 배경으로 삼아 영락없이 코끼리를 닯은 야산이 버티고 있는 모습은 신비스럽기 까지 하다. 그 안쪽에 당동마을이 있다.공예태후는 이곳에서 임원후(任元厚)의 딸로 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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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3.0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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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태자 왕비로 책봉된 후 그가 죽자 평생 수절했다는 허연지 할머니허씨 할머니는 장보고 딸이 아닐까 846년 장보고가 신라 조성에서 보낸 염장에 의해 암살된 것은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책봉해서 신라정권을 빼앗으려 했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신라 무신들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고 청해진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장보고의 딸이다. 장보고의 가족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이 있었는지, 딸은 몇이나 됐는지 전해오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단지 그가 딸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딸을 왕족과 결혼시키려 했으며, 그로인해 신라조정으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이다. 어려울 때 큰 도움을 받은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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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2.02.21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