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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청자장 집 앞마당서 청자기와 우수수 쏟아져최순우 실장 “이제야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6.25 직후 개성박물관에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피난 온 국보급 고려청자들은 1.4후퇴때 부산으로 다시 옮겨져 관재청 건물에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1951년 7월말의 일이다. 김재원관장이 최순우실장등을 관장실로 불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극비사항입니다. 부인들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내용은 그랬다. 며칠전 이승만 대통령이 고려청자를 포함한 국립박물관 주요 소장품을 미군 함정편으로 하와이 호놀루루미술관으로 옮기라는 극비 문건을 문교부 장관에서 발송했다는 것이었다. 전황이 불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공군이 더 많은 인해전술로 남하하면 부산도 안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8.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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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도 조선시대 청화백자 만들었을 증거물고려멸망 후 청자만들던 도공들 발자취 될 수도사철 발견은 강진에서 도자기 계속 만들었을 가능성 제시14세기 후반 고려의 패망과 함께 고려청자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후, 과연 강진에서 청자를 굽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다. 그 엄청난 청자를 생산하던 도공들이 갑자기 땅속으로 꺼졌을리는 없다. 그래서 청자가 쇠퇴한 후로 청자장인들이 옹기를 만들어 인근지역에 판매했을 것이라든가, 백자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들이 있지만 체계적인 연구가 없는 상태다.1978년 5월 어느날의 일이다. 도예가 조기정 선생(당시 41세)이 세계 최대 집단요지를 형성하고 있는 강진요의 신비를 풀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마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7.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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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뒤늦게 가해자들 기소 김강진 징역 1년6개월 구형방청석에서 박수소리… 1920년대 사회정의 확인할 수 있는 사건검찰이 부잣집 부녀자들의 집단 폭행사건을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해 주범인 김강진만 기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자 사회적 공분이 확산됐다.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전면도배하다시피 3차례에 걸쳐 보도하면서 이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담당 변호사인 여윤빈 변호사가 장문의 항고장을 만들어 검사국에 제출했다. 항고장은 구구절절 했다. 본인들의 진술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5명의 부녀자들이 양안순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것이 확실하므로 모두 기소해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항고장의 핵심내용은 그랬다.‘본 상해사건은 피해자인 양안순이 도립광주의원에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7.0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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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덤에서 나온 듯한 처참한 광경’가해자 5명 모두 부자집 부녀자들대서소는 고소장 안써주고의사들도 진단서 발급 거부 변호사들은 사건 수임안해검찰도 1명만 구속… 사회적 공분사1926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다섯명의 여성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후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양안순의 모습은 처참했다. 하열까지 해서 온몸에 피가 낭자했고 전신이 부어올랐다. 또 머리카락이 전부 쥐어뜯기고 뽑혀서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보지 못할 끔찍한 광경이였다. 임신 6개월 째인 양안순은 당시 충격으로 유산을 했다. 두 눈은 피를 많이 흘려 실명위기에 놓여 있었다. 폐렴이 악화돼 반신불수가 되어 1년 여 동안 꼼짝을 못했다. 머리털을 너무 많이 뽑혀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미친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6.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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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 5명,‘바람피웠다’소문 퍼트린 여성 집단폭행가해자들 모두 돈 많은 유력가 집안 부녀자‘사회적 관심’여대생을 청부살해한 기업체의 회장부인(68)이 유명대학병원에서 허위․ 과장 진단서를 끊어 4년간 대학병원 특실에서 호화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회적 공분이 확산되고 있다. 이 ‘회장부인’은 2002년 판사인 사위의 외도를 의심하고 사위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오해한 여대생을 조카에게 1억7500만원을 주고 청부살해한 희대의 사건이였다. 강진과 관련된 여성사건중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 1926년 7월의 사건을 꼽을만 하다. 그 사건은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전국적인 이슈였다. 김강진(당시 25세)이란 여성과 양안순(당시 32세)이란 여성은 모두 강진읍 서성리가 고향으로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6.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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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물가대책 후속조치 일제경찰이 대책회의 주관‘이발료를 10~40%까지 할인하라’강권도1922년 10월 강진군의 물가관리 방안이다. 1922년이라면 일제강점기 때의 일인데, 그때 강진의 물가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었을까. 당시 물가조정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동아일보 1922년 10월 30일자에서 발견돼 관심을 끈다.신문에 따르면 당시 물가관리는 강진군청에서 군청급경찰서의 지휘로 이뤄졌다. 군청급경찰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급인지 알수 없으나 요즘과 달리 일제경찰이 물가조정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10월 20일 군직원과 경찰서장급 군내유지, 잡화상인, 여관업자등이 어느장소에 모여 일종의 물가협정을 했다.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일상 필요용품중 채소류와 육류, 젓갈류의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6.11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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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맛있고, 깨끗하고, 가장 조선적인 음식 정평윤순탄씨 형제 동경에서 운수업 대 성공후 조선요리점 창업1916년 경성 한정식 문화 강진유입… 30년대들어 크게 꽃피운듯 강진 한정식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게 1916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대구 청자요지를 구경하기 위해 강진지역을 찾았을 때 강진 유지들이 경성의 궁중요리사들을 초빙했는데, 그때부터 강진한정식이 유명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냉장고가 있어서 필요한 음식재료를 사철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설이 없기 때문에 고급 한정식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1년 정도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야 사철 나오는 식재료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진유지들이 사이토 총독을 대접하기 위해 궁중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6.0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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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재판기간 중 이렇다할 증거물 제출하지 못해이용운씨 억울하고 부당하게 간첩누명 쓰지는 않았을까지난해 10월 22일 서울중앙지법 502호 법정에서는 재판부가 간첩누명을 쓰고 51년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심문규(당시 36세)씨의 유족에게 정중한 사과를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 21부가 심씨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자리였다.재판장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현대사의 격동기, 우리 사법체계가 정착 및 성숙되기 전의 일이지만 인권보호의 책임을 가진 사법부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재심 재판부는 죄송함과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사과했다.심씨는 한국정쟁 직후인 1955년 북파돼 임무를 수행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1년7개월 동안 대남간첩 교육을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5.2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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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위 증언만으로 간첩죄 적용 ‘총살형’당시 시대상황 무리한 간첩죄 적용가능성 많아1949년 8월 12일 김호익 총경을 사살한 이용운씨는 사건 발생 한달 보름만인 그해 9월 30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 받는다. 이용운씨의 혐의는 남로당특수별동대원으로서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행위)와 제33조(간첩죄)를 위반한 혐의였다. 이용운은 자신의 간첩혐의에 대해 끝까지 부인하고 변호인들도 이적행위와 간첩죄 적용은 무리가 많다고 주장하며 살인죄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중앙고등군법회의는 검찰의 기소내용에 충실했다.재판과정중에 나온 증인들도 이용운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사람들 뿐이였다. 이용운을 조사했던 경찰은 증인으로 나와 “피고는 김호익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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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5.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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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운 군법회의에서 극렬 항의경찰, 군사기밀 탐지했다는 이유로 군검찰에 넘겨1949년 8월 12일 병영 출신 이용운씨가 잘나가던 경찰관 김호익 총경을 사살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그는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남로당이나 북한과의 연계를 전면 부인했다. 그래서 변호인들은 이용운의 간첩행위는 무죄이고 살인죄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사법정은 이용운이 2년간 공산당교육을 받았으며 군사기밀 수집지령을 받아 방첩대등의 군사기밀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검찰측의 공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해 이용운을 총살형에 처했다. 이용운은 곧바로 총살에 처해 졌다.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수 없다. 그의 말대로 ‘조실부모하고 일찍이 고향을 떠나 일본과 중국등지를 돌아다녔다’고 진술한 것으로 봐서 특별한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5.0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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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남로당특수별동대장, 국회프락치 사건 보복 범행” 총살형 이용운 “나는 남로당도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은적도 없다”1949년 8월 12일, 서울 중앙청 앞 경기도청 옆에 자리잡은 시경 중앙 사찰 분실. 국회프락치사건 해결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김호익 총경이 피로해진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남로당에 포섭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미군철수법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문원, 노일환의원등이 징역 10년, 나머지 의원들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해방후 곤경에 처해 있던 친일경찰들의 입지를 살려준 사건이자 훗날 반민특위 해체를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호익 총경은 이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일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4.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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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형제들 상당수 일본유학, 귀국후 강진경제 이끌어비장아들 김방식씨 강진읍 남포~해창 간척사업 주도영랑 김윤식 선생도 같은 집안 출신6.25때 비장후손 현영씨 집에서 칩거하다 사망김안식선생과 김충식선생, 차종채선생등은 서로 엇갈린 삶을 살았지만 강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세사람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안식선생은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였고, 김충식선생과 차종채선생는 ‘한문수학’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세 사람에게는 그런일이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김안식선생은 체격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훤칠했다. 김충식선생과 차종채선생의 기개 강한 일화는 많이 소개됐지만 김안식 선생의 일화는 알려진게 많지 않다. 한가지만 소개한다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4.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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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식 - 일제항거 독립운동가, 정치인 · 사업가로 맹활약 차종채 - 탐진강 방조제공사 주도한 ‘남도의 호랑이’일제강점기 도평의원과 관료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김안식씨의 존재는 상당히 이단적인 모습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운동(강진에서는 4,4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강진의 경제력은 일본과 가까운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강진읍 서성리 출신의 김안식은 1889년생으로 1920년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이였다. 김안식씨는 일본에서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멤버였고, 입국과 함께 바로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4.4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강진의 4.4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장흥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을 선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4.0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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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남도회 친일파 · 일본인들이 장악김안식 “왜 토지 보상없이 강제로 기부를 받느냐”일본인 도지사 · 도간부들 압박… 전남도회 파란 1931년 5월 20일 면협의원선거가 처음으로 직선으로 열린다. 이때 강진면(훗날 강진읍이 됨)의 정원이 20명이였고 도암면이 12명, 옴천면이 8명, 나머지 면은 모두 10명이였다. 강진읍의 경우 이때 김충식씨와 김안식씨, 오응추씨, 김우식씨등 이름있는 사람들이 정계에 발을 딛었고, 군동면에서는 차종채, 오병석씨등도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또 이때 선거는 일본인들도 피선거권이 부여돼 강진읍에서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4.0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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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 관료’친일진상규명위 등재 양아들 채순병은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받아강진의 1호 도의원에 뽑힌 채수강은 연대적으로 볼 때 한일병합 직전부터 강진군수를 맡다가 그 후에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일제에 대단한 충성을 보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2009년 11월 발행한 보고서에는 조선인 관료 부분에 채수강의 이름이 등재돼 있다. 그는 강진군수를 마친 후 함평군수와 영광군수를 역임하는등 일제치하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다가 1920년 초에 퇴임한다. 아마도 영광군수를 퇴임하자마자 강진의 도평의원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극명히 대비되는 기록으로 그의 양아들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양아들 채순병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4.0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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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옷벗자 한쪽팔이 없었다… “내팔자야 ”신부 대성통곡 ‘집에 가라’‘갈수 없다’옥신각신결국 신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1929년 이런 일이 있었다. 옴천면 황곡리에 살던 스물한살의 한 총각이 영암면(지금의 영암읍) 회문리 주민의 집으로 장가를 들었다. 1929년 12월 19일의 일이였다. 두 사람은 혼례식을 무사히 마치고 간단한 피로연을 벌인 다음 마음설레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후, 아기자기한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나와야 할 신방에서 난데없는 통곡소리가 울려퍼졌다. 밖에서 잔치를 정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신방으로 뛰어갔다. 방안의 신랑 모습을 본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신부의 부모들도 대성통곡을 했다. 신랑의 한쪽 팔이 없었던 것이다.사연은 이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3.2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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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원 아들 김의원 딸 권총으로 쏘고 자신은 자살함께 감옥살이 했던 두 의원, 자녀들 맞선주선김의원 딸 “유학 다녀와서 결혼하겠다” 사양하숙집 찾아간 차군, 권총 난사1949년 1월 13일 밤 10시경 서울시 신촌동 70-47 한 주택가. 갑자기 밤하늘을 가르는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곧바로 비명소리와 함께 주택가 하숙방에서 한 여학생이 피를 흘리며 뛰어 나왔다. 방안에는 한 남학생이 쓰러져 있었다. 남학생은 강진의 제헌의원인 차경모의원의 아들이였다. 피를 흘리며 뛰어나온 여학생은 전북 장수지역 제헌의원인 김봉두의원의 딸이였다. 차의원의 아들(24)은 고려대 3학년에 재학중이였고, 김의원은 딸(23)은 이화여대 음악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남학생은 현장에서 숨졌고, 여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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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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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만주로 떠난 강진 사람들이행협씨 가족 만주가다 조치원에서 아이 죽어 ‘탄식’일제강점기 일본의 수탈에 못이긴 조선사람들은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였다. 흑룡강성의 한 신문은 1926년 7월에 이렇게 보도했다.‘조선농민이 북만주로 이주하는 원인은 일본의 조선점령이후 일본인이 조선에 물밀 듯이 들어와서 쫒겨나오는 까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은 농산물이 풍족치 못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늘어나 먹을게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다’다행히 1920년대 이주 초기에는 북만주 지역에 풍년이 자주 들어 만주에 가면 잘먹고 잘 살수 있다는 소문이 조선내에 퍼졌다. ‘만주에서 말타고 개장수 할 때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때의 말이다. 조선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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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춘 기자
2013.03.0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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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똥통에 빠져 질식사… 가난한 시절 슬픈사연지난해 강진에서는 매몰사고가 두건이나 있었다. 10월 17일에는 작천의 오리농장에서 붕괴사고가 발생해 3명이 매몰돼 숨진데 이어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10월 26일에는 군동에서 마을정자의 지붕이 무너져 마을주민 1명이 사망하고 작업중이던 근로자 5명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근세들어 역사적으로 가장 참혹한 붕괴사건은 1929년 5월 강진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해 5월 10일 강진읍 서성리에서 김병진씨란 주민의 집에서 팔순잔치가 열렸다. 지금은 남의집 잔치집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70년대까지만해도 어느집 잔치가 열리면 구경꾼이 많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으면 주인은 떡이나 약과를 나누어 주는게 관례였다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2.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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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6명, 작은 섬 어린이들 대발견전국과학전람회, 대통령상 첫 초등학생 수상‘낙도 어린이들의 쾌거’전국 언론 대대적 보도당시 학생들 지금은 평범한 사회인바닷물이 꽉 차기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또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바닷물이 잠시 머무르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이같은 내용은 해양전문기관에서 당연히 알아야 할 자료로 보이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기관이 없었다. 학계에서나 정부에서나 바다는 관심밖의 장소였다. 쌀이 중요했지 꼬막이 중요한 시대는 아니였다.그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이 다름 아닌 도암 가우도 분교 어린이들이였다. 1982년 9월 11일 제28회 전국과학전람회 심사결과가 나왔
그때 그사건
주희춘 기자
2013.02.06 10:23